[힘! CEO 리더십-(18) 동양그룹 이양구 선대회장·현재현 회장] 이윤보다 국익을 고민하다

입력 2010-04-14 21:15


1960년대 초 어느 날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동양그룹 창업주인 서남(瑞南) 이양구(1916∼1989) 회장을 불렀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동원 박사는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청탁은커녕 오히려 박 대통령한테 이 나라를 위해 일 잘하라고 부탁하더라”고 두 사람의 대화를 기억했다. “허허, 내가 기업하는 사람 숱하게 봤지만 청탁 않는 사람은 임자가 처음이오.”

이양구 선대회장, 기업 기틀 다진 철학자 회장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하며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라.’ 동양그룹의 기업 정신이다. 동양그룹은 50년 넘게 이 정신을 바탕으로 시멘트부터 금융까지 튼실한 기업을 키웠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해왔다.

이 회장은 정직과 신용으로 기업을 키우고 이를 통해 조국 근대화와 민족 번영을 이루겠다는 뜻을 품고 살았고 그의 말과 행동, 회사 경영에서 자연스레 배어났다. 집권기간 여러 차례 이 회장을 만났던 박 전 대통령은 이 회장을 두고 ‘철학자’라 불렀다.

1916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웠던 가정환경 탓에 15살 때부터 식료품 도매상의 사환 일을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일한 덕분에 3년 만에 정식 사원이, 다시 3년 만에 간부 사원이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청년이 일본인을 제치고 간부사원이 된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이곳에서 8년간 일하면서 평생의 경영철학인 정직과 신용을 터득했고 이를 자산으로 해방 후 남한에서 설탕 도매업을 시작해 ‘설탕왕’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1956년 성공한 기업가인 그에게 삼척세멘트(현 동양시멘트) 인수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삼척세멘트는 시설이 낡은데다 수입, 원조 시멘트가 국내로 쏟아지면서 시장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있던 상황. 주변에선 ‘제분이나 면방직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골치 아픈 공장을 인수하느냐’며 강하게 반대했다. 스스로도 “소비경제에 들떠 있던 경제계에서 만성 적자인 시멘트 공장 인수는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윤을 따지는 사업가로서 그걸 모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면서 사회적으로도 공헌할 수 있는 업종이 무엇일지 늘 고민해왔다. 시멘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조속히 재건하고 도로와 항만 등 국가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회사 간부들과 동업자들을 간곡하게 설득했고 결국 1957년 동양세멘트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시작은 미약했다. 시멘트회사를 인수하는 데 당시 돈 1억환이 들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만에 1억환 적자가 났고 결국 동업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골칫덩이 회사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이 회장은 오히려 시설확장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1959년, 1961년 각각 1차, 2차 확장을 완료했다. 3차 시설확장이 완료된 1967년엔 연간 생산능력을 100만t으로 늘리면서 국내 최대 시멘트 제조회사로 등극했다. 이 회장은 훗날 “나는 만난(萬難)을 배제, 이를 위해 생애를 바치는 데 조금도 후회가 없음을 자신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회장은 새마을운동 지붕개량 아이디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은 땔감이 없기 때문이고 땔감이 없는 것은 지붕 올리느라 짚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붕을 시멘트로 개량하고 대신 짚을 연료로 쓰면 벌목이 사라져 자연스럽게 숲이 복원된다는 것. 그는 60년대 말부터 지붕개량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녔고 자연스럽게 새마을운동의 단초가 됐다.

현재현 회장, 중견그룹 일군 금융전문가

국내에 선물(先物)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현재 동양그룹을 이끌고 있는 현재현 회장이다. 그는 지난 90년 국내 최초의 선물회사인 동양선물을 설립했고 선물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1993년엔 금융선물협회 초대회장도 역임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현 회장은 지난 75년 부산지검 검사로 부임해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 회장의 첫째 딸인 이혜경 동양레저 부회장과 결혼한 뒤 미국 명문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공부하면서 전문경영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특히 현 회장은 수학중 금융업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깨달았다. 선대회장이 시멘트로 기간산업을 담당했다면 현 회장은 금융으로 국가 기간산업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현 회장이 경영자로 평가받은 첫 사업은 지난 84년 일국증권(현 동양종합금융증권) 인수다. 당시만 해도 증권업은 잇따른 대형사고와 경영 부실로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 회장은 임원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며 인수 작업을 완료했다. 인수 당시 자본금 20억원에 지점이 하나뿐이던 이 회사는 불과 5년 만에 10대 증권사로 성장하는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현 회장은 이후 동양투자자문과 동양생명, 동양창업투자 등을 차례로 설립하며 제조업 중심이던 동양을 제조와 금융이 조화를 이룬 그룹으로 탈바꿈시킨다.

현 회장의 탁월한 능력은 97년 말 불어 닥친 외환위기 때 다시 한 번 증명됐다. 연일 은행이 쓰러지고 증권사가 문을 닫았다. 일부만이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받아 겨우 되살아났다. 하지만 사회공헌차원에서 금융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온 현 회장의 경영철학에 따라 동양 금융계열사는 공적자금 없이 자력으로 고난을 극복해냈다. 양적 성장보다는 내실 있는 성장을 추구해온 현 회장의 경영전략 덕분이었다.

동양오리온투자신탁은 정부의 지원 없이 경영정상화에 성공했고 5000억원 상당의 고객 손실을 전액 보전해주기까지 했다. 당시 이 정도 돈이면 국내 상위권 기업을 인수, 그룹 덩치를 키울 수도 있었지만 현 회장은 기업 이익 대신 국가경제와 고객을 우선했다.

현 회장의 경영전략은 10년이 지난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은 CMA트렌드를 선도하고 있으며 업계 유일의 브랜드 ‘수호천사’로 유명한 동양생명보험은 11년 연속흑자를 바탕으로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에 성공하기도 했다.

친환경, 자원전쟁 시대를 맞아 동양은 친환경·자원 기업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동양시멘트는 유전개발업체인 골든오일과 합병하며 해외자원 개발 사업을 본격화했고 동양매직은 폐기물을 줄여 대기오염을 완화시킬 수 있는 친환경 설비사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변신엔 해외자원 개발로 자원이 부족한 국가 경제에 기여하면서 깨끗한 환경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현 회장의 사명감이 담겼다.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