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9) 남편과 함께 ‘바다로 가자’ 작사·작곡

입력 2010-04-14 17:29


나에게도 해군은 자식 같았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부른 노랫소리를 들었다. 일본 군가에 한국 가사를 붙여 대한민국 해군이 부르고 있었다. 남편 손원일 제독도 “저건 아니야. 우리가 고쳐야지”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남편은 해군이 부를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직접 가사를 썼고, 내가 곡을 붙였다. 그렇게 나온 노래가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의 ‘바다로 가자’이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또 이은상 시인이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 해군사관학교 교가도 완성했다. 한 달 동안 매달려 탄생한 작품이다. 이밖에 ‘해방행진곡’ ‘대한의 아들’ ‘해사 1기생가’ ‘해사 5기생가’ ‘해사 16기생가’ ‘해군부인회가’ 등을 작곡했다.

남편의 귀가시간은 언제나 한밤중이었다. 가족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남편은 틈틈이 자녀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아이들이 꼭 간직해야 할 마음을 되짚어주곤 했다.

어느 겨울날, 일찍 들어온 남편이 두 아들을 불렀다. 여섯 살 명원이와 네 살 동원이의 옷을 모두 벗긴 뒤 뜨끈한 아랫목에 앉혔다. 남편은 일제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날씨가 궂은 날엔 늘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그렇게 아랫목에 몸을 누였다. “너희 둘 중에 방바닥에 더 오래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잘 익은 연시를 주겠다.”

아이들은 금세 뜨거워진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버텼다. 잠시 후 남편은 “마당으로 나가 100을 세고 들어오너라”고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식히려고 추운 마당으로 뛰쳐나온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노심초사했다.

어느 새 100을 세고 다시 아랫목으로 뛰어 들어간 아이들 앞에 연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남편은 꽁꽁 얼어붙은 아이들의 손과 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실 때 가끔 일본 경찰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쳤어. 그런데 경찰이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면, 이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거야. 사실 할아버지는 속옷 차림으로 집 뒤쪽으로 도망쳐 눈 속에서 몇 시간씩 숨어 계셨다는구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평생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사셨어. 지금 너희가 따뜻한 방 안에서 입고 있는 옷 한 벌, 연시 한 개가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말아야 해.”

우리 부부에겐 가슴에 묻은 딸도 있다. 이름은 영자. 둘째 명원이가 태어나던 해 여름 밤, 갓 태어난 명원이만 모기장에서 재운 게 화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영자의 몸 여기저기에 모기 물린 자국들이 보였고, 온 몸은 불덩이였다. 병원에선 단순한 감기라고 했다. 약을 먹여도 열이 내리지 않았고, 결국 영자는 열병의 악화로 소아마비가 되고 말았다.

몸은 불편했지만 영자는 밝게 자랐다. 그러나 독일대사 시절, 그만 물놀이 사고로 영자와 이별하고 말았다. 1959년 7월 19일, 영자의 나이 19세였다. 소중한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얼마나 울었는지…. “영자야, 엄마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