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추억을 찾는 이들의 쉼표를 싣고…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입력 2010-04-14 17:42
기차가 벚꽃터널을 지나고 사과밭을 달린다. 고모 화산 우보 이하 마사 개포 용궁 등 이름조차 생소한 경북내륙지역의 간이역이 차창을 스친다. 지어미는 논두렁 밭두렁에서 봄을 캐고 지아비는 워낭소리 울리며 밭을 간다. 하굣길 아이들이 간수 없는 건널목에서 가녀린 코스모스처럼 손을 흔든다. 추억을 찾아 나선 나그네들의 쉼표와 느낌표를 실은 기차가 마침표 없는 선로를 달린다.
장난감기차처럼 앙증맞은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가 기적을 울린다. 설레는 가슴들을 태운 테마열차가 선로가 거미줄처럼 복잡한 동대구역에서 사다리타기 게임을 한다.
차창 밖으로 회색의 도시가 흐른다. ‘비 내리는 고모령’의 애절한 전설을 뒤로한 채 오후의 햇살에 젖어 더욱 환한 고모역 벚꽃이 먼 길 떠나는 열차를 향해 흰옷 입은 어머니처럼 손을 흔든다.
경부선에서 대구선으로 선로를 바꾼 테마열차가 버드나무 새순이 연둣빛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금호강을 건넌다. 영천오일장을 본 할머니 승객 몇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손주 자랑을 한다. 추억을 찾아 나선 노부부의 이야기꽃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난 젊은 연인들의 속삭임이 기적소리에 스며든다.
북영천역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탄 테마열차는 군위 산성면에서 화본역이라는 이름의 그림 같은 간이역을 만난다. 화본역은 네티즌 철도동호회원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간이역. 측백나무 울타리 옆에는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콘크리트 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이다.
분홍색 페인트로 곱게 단장한 화본역은 테마열차를 포함해 상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6번 정차하는 역. 평일 철도 이용객이 2∼3명에 불과할 정도로 한적하지만 영천오일장이 서는 2일과 7일에는 장날처럼 시끌벅적하다. 네댓평 남짓한 대합실에는 부산으로 친정나들이를 간다는 60대 시골 할머니와 몇 년에 한번씩 고향마을을 찾는다는 70대 서울 할머니가 만나 사돈의 팔촌까지 들먹이며 인연의 끈을 찾는다.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 앉은 자리 꽃 진 자리 꽃자리 / 선 자리 꽃자리 꽃 뿌리 눈물 뿌리 / … / 산모롱 굽이 굽이 돌아 / 오솔길 따라 꽃 진 길 가네 / 산모롱 굽이 굽이 돌아 / 돌아누운 낮달 따라 가네 / 낮달 따라 꽃 따라 가네’
아담한 역사 앞에서 ‘화본역’이라는 제목의 시비 하나를 발견한다. 시인은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는 역순례 시집으로 유명한 박해수씨.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 ‘바다에 누워’의 작사자이기도 한 시인은 전국의 기차역을 소재로 시를 쓰는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다. 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의 시비를 간이역에서 만날 때마다 함께 기차여행을 떠난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역무원들만 남은 쓸쓸한 화본역을 뒤로하고 테마열차는 파릇파릇한 마늘밭이 바둑판처럼 펼쳐진 의성을 달려 이내 안동 땅을 밟는다. 안동철교 아래로 바싹 야윈 낙동강이 흐른다. 강심에서 날아오른 왜가리 한 마리가 안동선비처럼 고고한 자세로 날갯짓을 한다.
낙동강과 이별한 테마열차가 봄기운이 완연한 경북 내륙의 산과 들을 달린다. 수채화처럼 은은한 차창 밖 풍경이 익숙해질 즈음 색소폰과 통기타 선율이 승객들을 3호차 이벤트실로 불러 모은다. 자원봉사들의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무명가수의 흘러간 옛 노래가 덜컹거리는 열차의 리듬을 탄다.
4량으로 이루어진 테마열차에는 안동간고등어와 군위한과세트 등 경북에서 생산된 특산물 35종을 전시판매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와인카페에서는 청도 감, 의성 사과, 김천 포도 등 지역특산물로 만든 와인도 맛볼 수 있다. 객차의 모니터를 통해 시군별 홍보영상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해질 무렵의 들녘은 한 편의 서정시이자 한 폭의 수채화이다. 영주역에서 경북선으로 갈아탄 테마열차가 회룡포로 유명한 용궁에 들어서자 날이 저문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집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고 들녘에서 밭일을 하던 촌로들은 서둘러 집을 향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른 파르스름한 연기가 산자락에 안개처럼 드리운다. 모두 추억의 앨범 속에서나 만나는 풍경들이다.
점촌역 도착 1분 전. S자를 그리며 산모롱이에서 나타난 테마열차가 영강철교를 건넌다. 문경을 동서로 흐르는 영강의 거울 같은 수면이 주황색 분홍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단장한 4량의 테마열차로 인해 색색의 물감을 뿌린 듯 황홀하다.
광부의 애환과 통학생의 낭만이 사라진 점촌역은 타고 내리는 사람이 드물지만 정거장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2년 전 명예역장과 명예부역장으로 매스컴을 탔던 강아지 아롱이와 다롱이는 몰라볼 정도로 컸다. 역사 앞에 전시된 추억의 증기기관차는 금방이라도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녹슨 기찻길을 달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나트륨등이 불을 밝힌 플랫폼에는 오전에 출발한 테마열차를 타고 문경에서 한나절 관광을 즐긴 여행객 몇 명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점촌역은 경북서선 지선인 가은선의 출발점. 발갛게 녹슨 기찻길을 달리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손으로 작동하는 완목식 신호기가 남아있어 ‘살아있는 철도시설 박물관’으로 불리는 주평역이 나온다. 가쁜 기적소리와 함께 검은 석탄가루를 싣고 터널을 빠져나오던 화물열차가 사라진 불정역과 진남역은 문경철로자전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던 낭만의 점촌역을 출발한 테마열차가 짙은 어둠에 싸인 상주 들판을 달려 김천역에서 다시 경부선으로 갈아탄다. 그리고 구미에서 낙동강을 건너고 야경이 아름다운 대구 시가지를 달려 종착역인 동대구역에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시속 300㎞로 날아다니는 KTX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속도경쟁 시대에 워낭소리 울리는 달구지처럼 느릿느릿 길을 떠나는 경북관광테마순환열차는 느림과 여유의 맛과 멋을 되찾아주는 ‘슬로 트레인’이라고 할까.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