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8) 해군 창설 즉시 해군병학교부터 설립

입력 2010-04-13 17:18


“바다에 뜻을 가진 애국 청년들이여, 모입시다!”

남편 손원일 제독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서야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꿈, 해군 창설에 앞장섰다. 그는 담벼락마다 광고문을 붙이고 다녔다. 70명이 모였다. 절대 ‘본적’을 쓰지 않았다. 지역별 파벌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그는 해군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도 도별 의식이나 친인척의 청탁을 배격해 공정하게 인사했다. 무엇보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주군대 육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1945년 11월 11일, 미국 군정관과의 여러 차례 협상 끝에 항무청 건물 사용 합의를 이뤄내고 태극기를 게양한 뒤 휘날리는 국기를 바라보며 해군 첫 입소식을 가졌다. 해군이라는 정식 명칭도 없던 시절, 손 제독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해군 창설 두 달 만인 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49년 1월 15일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를 설립, 초대 교장을 맡았다. 1기생으로 113명을 선발해 46년 2월 입교식을 가졌다.

남편에게 생도들은 자식이었다. 배도 없고, 보급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배움의 사명을 감당하는 1기생을 늘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8개월간의 학업을 마치고 실습을 위해 미군 측과 협의하여 구축함 한 척을 배정받아 그 함정에서 실습했다.

그들을 직접 가르쳤던 미군 교관은 “한국의 해군 생도들이 대단하다. 수십년 동안 배운 공부를 수개월 만에 터득하고 실습에서도 어느 해군 못지않은 능력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그러면 손 제독은 마치 자식 자랑하듯 생도들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생도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든 상황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누구 하나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참아주고 따라와 주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희생정신을 가진 그들이 앞으로 후배 해군들을 위해 든든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해군이 발전하는 데 희망의 싹을 틔울 것입니다.”

46년 가을, 마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생도들이 마산으로 행진을 하게 됐다. 일본 군복을 고쳐 짝짝이로 입은 생도, 티셔츠를 군데군데 기워서 입은 생도, 때가 덕지덕지 묻은 한복 저고리에 구멍 난 고무신을 신거나 사이즈가 큰 미군 구두를 끌고 가는 생도 등 그 모습이 다양했다. 지금의 신사 해군을 떠올리면 그저 안쓰러울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이라는 자부심만큼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 대통령은 악조건을 무릅쓰고 해군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손 제독과 해군 모두의 노고를 치하했고, 꼭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한 ‘해·육·공’ 중 가장 먼저 손 제독을 불러 대장으로 승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손 제독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해군의 계급은 배의 수에 따라 그 함정의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해군은 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대장으로 지명하시면 온 세계 해군들이 웃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해군이 많은 수의 함정을 갖게 되면 그때 대장 계급을 받겠습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해군의 발전을 더 소중하게 여긴 남편 손 제독은 진정 해군의 아버지였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