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4·19를 앞두고
입력 2010-04-13 01:13
참을 수 없을 만큼 존재가 가벼워지는 시대. 그 시대의 말은 더없이 가벼워졌다. 범부의 말은 물론 대통령의 말씀도 무게를 갖지 못하는 시대에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조했다. 2008년 6월 국가유공자 유가족 오찬 자리에서 “국가유공자들이 몸소 보여준 나라사랑 정신이야말로 선진 일류국가 건설과 민족 번영을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2009년 6월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와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지원하는 것은 선진 일류국가로 나아가는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선진 일류국가를 향한 대통령의 집념이 엿보여 미소 지었다.
지난달 30일 대통령으로선 처음 방문한 백령도에서 그는 “나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끝까지 보호하고 예우를 강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때는 고개를 외로 꼬며 ‘말로만’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최근 겪은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소소한 개인사에 기대 대통령의 말씀을 비아냥거린다는 나무람이 있을 수 있겠다. 하여 민망한 일이지만 요즘 겪은 일을 털어놓으려 한다. 정년 후 명예교수로 재직하던 친정아버지가 올해 은퇴를 하셨다. 사오정 시대에 칠순 넘어서까지 강단에 섰으니 복을 누린 셈이지만 그 허전함은 크신 듯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모의를 했다. 4·19 50주년인 올해 당시 공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발굴해 포상한다니 신청해보자고.
그 당시 아버지는 4·19 학생혁명 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그해 5월 19일 거행된 순국학도 합동위령제 때 학생 대표로 추모사를 지어 읽었다. 이후에도 4·19민주혁명회 이사로 활동하시는 등 관련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니 모자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직까지 유공자가 되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제 와서 뭐 그럴 게 있느냐”는 아버지를 부추겨 자료를 모았다. 꽤 두툼한 봉투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렸는데 지난달 20일쯤 의외의 전언이 왔다. 아버지와 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두 분 등 세 분이 “유신 지지를 해서 탈락되는 것 같다”는 귀띔이었다. 지난 신문을 찾아보니 4·19세대 45명이 유신 지지 결의문을 냈고, 세 분 모두 이름이 있었다. 세 분은 그런 결의문에 대해 논의한 적도, 서명한 적도 없다고 했다. 당시 활동을 같이 했던 여러 분들이 이런 사실을 입증하겠다고 나섰다. 주변에선 명의 도용으로 고소해야 한다고 과격한 주장을 하는 분도 있었다. 그중 몇몇 분의 확인 서명을 받아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다. 이후 아버지는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형식적인 답장을 받았고, 나머지 두 분은 그마저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국가유공자 예우를 잘 하겠다’는 대통령 말씀은 원호의 달이나 재난 현장에서 늘어놓는 인사치레인 것 같다”면서 한숨지었다. 아니라고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1960년 4월 19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죽은 줄 알라”며 집을 나섰다는 아버지, 그래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눈물로 들었다는 어머니. 19일 그분들을 무슨 낯으로 뵐까.
12일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유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세 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한 흔적이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던 이들이 유신정부를 지지한 게 자랑할 일은 못되지만, 그것이 4·19혁명 공적 논의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하물며 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국가보훈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끝까지 추적 발굴해 확실한 예우와 보상을 하겠다”고 공언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허언(虛言)이 되지 않도록 앞으로 사실 확인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래서 또 내 아버지처럼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