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17)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어머니 혼’ 담긴 머릿기름서 출발 화장품시장 석권
입력 2010-04-12 20:09
아모레퍼시픽의 역사는 ‘머릿기름’에서 시작됐다. 반듯하게 가르마를 탄 쪽머리에 비녀를 찌르는 게 전형적인 머리 모양새였던 1900년대 초반 머릿기름은 여성들의 필수품이었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장원(粧源) 서성환(1924∼2003) 회장의 어머니 윤독정(1891∼1959)씨는 1932년 개성 자남산 자락에 있는 기름시장에서 머릿기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머릿기름 판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부터는 화장품 제조에 나섰다. 첫 제품은 ‘미안수’(스킨로션)였다. 이후 구리무(크림), 백분 등으로 품목을 늘려나갔다. 가게가 번창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창성상점’ 간판을 내걸었다. 아모레퍼시픽의 뿌리다.
◇어머니의 혼이 담긴 아모레퍼시픽=3남3녀 중 넷째(차남)인 서 회장은 10대 후반부터 어머니에게서 화장품 제조 방법을 전수받았다. 도매상에 물건을 납품하고 시장에서 판매하는 일도 도맡았다. 개성 서북방 예성강 상류지역인 금천, 예성강 건너의 배천, 봉천 등 장이 서는 곳을 찾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원료구매, 상품제조, 판매에 이르는 노하우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서 회장은 생전에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키운 기업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현재 아모레퍼시픽 직원(3663명) 중 62%는 여성이다.
◇그룹을 수렁에서 구한 ‘포마드’=일제 강점기 만주로 강제징용됐던 서 회장은 46년 개성으로 돌아왔다. 창성상점은 제조장과 창고, 판매장을 갖추고 제법 규모 있게 운영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서 회장은 상호를 ‘태평양상회’로 공식화하고 영문표기를 ‘tai pyung yang’으로 정하면서 큰 바다를 향한 꿈에 첫발을 내디뎠다. 회사도 개성에서 서울 남창동을 거쳐 회현동으로 옮겼다.
착실하게 사업기반을 쌓아가고 있을 즈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4후퇴 때 짐을 꾸려 부산행 피란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포마드(반고체 상태의 남성용 머릿기름)가 큰 인기를 끌었다. 양복 입은 신사들뿐 아니라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긴 윗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좌우로 갈라붙이는 스타일이 유행했다. 회현동 시절 출시한 ‘메로디’ 포마드는 부산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국산 포마드는 심하게 번들거리고 머리를 감아도 기름기가 잘 빠지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매일 포마드를 사용하던 서 회장도 그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서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순식물성 포마드를 벤치마킹해 51년 바셀린 대신 피마자유를 사용한 국내 최초 순식물성 제품을 내놓았다. 브랜드 이름도 ‘메로디’에서 ‘ABC’로 바꿨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ABC포마드’는 출시되자마자 시장을 석권했다.
53년 휴전과 함께 이듬해 서울로 귀환한 서 회장은 후암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갈 때였지만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더 이상 감각과 경험에 의존해 제품을 개발하던 시대는 지났다. 명확한 이론과 계량적인 데이터에 바탕을 둔 과학적인 기술이 필요한 시대가 온다”고 내다본 것.
그는 화장품 연구소 설립에서 해답을 찾았다. 회사 측은 78년 연구소를 확대 개편한 이래 매년 총 매출액의 3.5% 이상을 연구·개발 부문에 투자하고 있다. 92년 8월에는 경기도 용인에 규모 22만7108㎡(6만8700여평), 300명의 인력을 수용할 수 있는 ‘태평양 종합기술연구소’를 완공했다.
◇문화를 바꾼 ‘녹차사업’=“차 사업을 하고 싶소. 하지만 차 사업이 돈이 당장 벌리는 사업은 아니요. 이 사업은 문화 사업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소비자나 국민한테 태평양의 이미지가 달라질 겁니다. 내가 이 사업을 추진할테니 여러분들은 지켜봐주소.”
79년 어느 날 소집한 긴급 이사회에서 서 회장은 녹차 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사업상 외국을 자주 드나들던 그는 나라마다 고유한 전통차와 차 문화가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는 왜 없을까’라는 안타까움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70년대 이후 몇몇 대기업이 녹차 사업을 검토했지만 사업성이 떨어져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태평양 중역들도 화장품 회사가 녹차 사업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만류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간 작업의 첫 삽을 뜬 곳은 제주도 한라산 남서쪽 중턱에 위치한 도순다원. 8만2645㎡(2만5000평) 넓이 황무지의 돌을 걷어내고 땅을 골랐다. 이어 81년 전라도 강진, 83년 제주 서광다원의 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83년 서 회장은 제주 도순다원에서 수확한 찻잎을 이용해 ‘한라진수’ ‘삼다진수’ 등 다양한 신제품을 선보였다. 87년 강진 월출산다원과 88년 제주 서광다원에도 공장이 들어서면서 차 재배에서 완제품 생산에 이르는 생산 체제가 갖춰졌다.
97년 태평양은 녹차사업에서 처음 흑자를 달성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어서까지 이윤이 나지 않는 투자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서 회장의 우직한 뚝심 때문이었다. 현재 ‘설록차’는 아모레퍼시픽 녹차 사업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
◇일로향각(一爐香閣)=92년 폐암 수술을 받은 서 회장. 그는 태평양제약을 기획조정실장이던 차남 서경배 대표에게 맡겼다. 당시 태평양제약은 경영상태가 최악이었다. 서 대표는 세계 최초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 ‘케토톱’을 개발해 흑자로 전환시키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97년 대표이사 취임식에서 그는 “으뜸 상품, 으뜸 서비스, 일의 양과 질의 으뜸이라는 면에서 각자 자신과 부서를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오늘 이후 모든 부문에서 으뜸이 되도록 노력해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서 대표는 2002년 설화수 헤라 아모레퍼시픽 리리코스 아이오페 마몽드 라네즈 이니스프리 에뛰드 미쟝센 10개 브랜드를 집중 육성키로 했다. 여기에 프랑스 현지 법인의 롤리타 램피카가 더해졌다. 태평양은 같은 해 회사의 영문이름과 브랜드 명을 ‘AMORE-PACIFIC’으로 바꿨다. AMORE-PACIFIC 브랜드는 2003년 9월 미국 뉴욕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 입점을 시작으로 2006년 일본 등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서 대표는 2008년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라는 비전을 발표했다. 10개의 메가 브랜드를 육성해 세계 10대 화장품 회사로 성장한다는 것. 비전 선포 이후 2007년 1조3570억원이던 매출은 2008년 1조5313억원, 2009년 1조7690억원으로 뛰었다.
“‘일로향각’(一爐香閣·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 향기를 만든다)의 자세로 자연과 사람, 아모레퍼시픽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해, 이로 인해 만들어질 더 아리따운 세상을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서 대표의 다짐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