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대통령機 추락 참사] “회항하라” 관제탑 지시에도 무리한 착륙 왜?

입력 2010-04-11 19:10

대통령, 중앙은행 총재, 대선후보, 군 참모총장, 국가안보국장….

10일(이하 현지시간)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은 폴란드 지도자들이다. 폴란드가 ‘국가 지도부’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비행기 추락 원인을 둘러싸고 의혹만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폴란드는 위기 상항을 맞아 조기 대선 정국으로 급속히 재편될 전망이다.

◇무리한 착륙 시도 ‘최대 의문’=폴란드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한 러시아 스몰렌스크 공항 주변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다른 비행기들도 안개 탓에 결국 회항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고기는 무려 4차례나 착륙을 시도했다. 주변에 있는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으로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도 무시했다고 AFP 통신 등이 보도했다. 결국 사고기는 활주로에서 300여m 떨어진 숲속에 추락했다. 두 차례 폭발과 함께다.

러시아는 조종사의 실수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조종사가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제탑의 회항 지시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기체 결함 가능성도 제기된다. 러시아 언론들은 “사고기가 첫 번째 착륙 시도 전부터 연료를 버리고 있었다”며 “기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카친스키 대통령이 탔던 사고기는 20년 이상 된 러시아제 투폴레프(Tu)-154 비행기다. Tu-154기는 보잉 727기의 복제판 항공기로 1968년 10월 첫 제작된 이후 66건의 사고로 100명 안팎이 사망한 ‘사고뭉치 비행기’로 알려져 있다. 테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현재로선 낮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동정표’ 변수 되나=폴란드 대선은 당초 오는 10월이었지만, 이번 사고로 일정이 앞당겨지게 됐다. 폴란드 헌법에 따르면 하원의장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날부터 14일 이내에 선거 일정을 공고해야 한다. 선거일은 공고일부터 60일 이내로 정해야 한다.

대선은 당초 카친스키 대통령과 보르니슬라브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 예리치 스마이진스키 하원 부의장의 3파전이 예상됐었다. 그러나 카친스키 대통령과 스마이진스키 부의장이 사망했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 대행인 코모로브스키 의장이 유일한 유력 후보로 남게 됐다.

변수는 있다. 동정표다. 카친스키 대통령의 형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당수가 이끄는 법과 정의당이 당초의 열세를 만회할 틈새가 생긴 것이다. ‘카친스키 형제의 시대’가 막을 내릴지가 최대 관심사다.

◇불편한 악재 추가=카친스키 대통령은 개인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국 관계의 불편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폴란드는 2차 대전의 기폭제가 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뒤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한 사과를 지난해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또 폴란드는 2005년 러시아가 자국산 육류 수입을 금지하자,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막겠다고 경고하는 등 양국은 사사건건 부딪혀 왔다. 이번 사고가 과거사 문제로 러시아에 대해 반감이 있는 폴란드 국민들의 정서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다.

Key Word : 카틴 숲 학살 사건

구소련이 폴란드 사회지도층 인사 2만여명을 재판 없이 학살해 암매장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봄 당시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KGB 전신)는 현재의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에 주둔하던 폴란드 장교와 교수, 의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 2만2000명을 총살 처형했다.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43년 독일 나치가 이 지역에서 4000여구의 폴란드인 시체를 발굴하면서였다.1년 뒤 카틴 지역을 탈환한 소련은 또다시 폴란드인의 시체를 추가 발굴했고 나치의 소행으로 돌렸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행위가 명백했지만 연합군 유지를 위해 눈감았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1990년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카틴 숲 학살의 진상조사를 지시했고 스탈린의 명령에 의한 소련군 개입을 인정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