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년, 어제와 오늘] “참혹한 주검… 壽衣조차 입히지 않고 흙속에”

입력 2010-04-11 23:14


1회:김주열 열사의 흔적을 찾아서

“1960년 3월 15일 오후 동생 걱정이 된 광열이가 집으로 돌아와 주열이에게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혼자 나갔대요. 그런데 한참 시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앞길 한복판에서 흰 티셔츠를 입고 주먹을 치켜세우고 있는 주열이가 보이더래요. 대부분 어두운 옷을 입은 군중 속에 유독 흰 옷을 입은 주열이에게 경찰이 직격탄을 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주열 열사의 고향 선배인 하용웅(68·경남 창원시)씨는 11일 절친했던 동네 친구이자 김 열사의 친형인 광열(1985년 작고)씨로부터 들은 50여년 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씨는 그러나 지금까지 경찰은 유족에게 사과 한번 없었다고 말했다.

하씨는 전북 남원시 금지면 김 열사의 옆집에 살았다. 광열씨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나로 인해 김 열사가 억울하게 죽게 됐다는 죄책과 회한 속에 50년을 살아왔다”고 털어놨다. 60년 초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3학년이던 하씨는 김 열사에게 이 학교에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김 열사는 남원농고에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둔 뒤 고교 입시를 다시 준비 중이었다.

하씨는 “시위대에서 주열이를 발견한 광열이가 사람들을 헤치고 고함을 치며 다가가 동생의 손을 잡았지만 밀리는 사람들의 힘에 그냥 놓치고 말았다”며 “그게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고 전했다. 마산상고 시험을 치른 동생과 함께 3월 16일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경남 마산시 장군동 이모할머니 집에서 머물고 있던 광열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음날 학교에 가 합격증을 받았으나 주열씨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하씨는 그동안 김 열사에 관한 기록들이 왜곡되거나 폄훼되는 일이 있었다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그는 “주열이가 당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는 식으로 죽음의 의미가 훼손되는 일이 있어 너무 안타깝다”며 “그때는 모두가 처음엔 ‘구경’하러 나갔다가 데모꾼이 됐지, 80년대처럼 계획을 세워 시위를 한 게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며칠 뒤 김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89년 사망)씨가 마산으로 달려가 눈물겨운 아들 찾기를 시작한다. 온 시내와 관공서 등을 헤집으며 거의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4월 8일쯤 주열이 어머니를 만났어요.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살은 쭉 빠져 있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이 온 몸에 가득했어요.”

건강이 걱정이 된 많은 분들의 권유로 권씨는 27일 만인 4월 11일 남원행 버스를 탄다. 그러나 그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사건이 터진다. 마산 중앙부두에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김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다. 경찰이 사망소식을 전해줬으나 마산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미 온 집안이 경찰의 감시 안에 들어 있었다.

김 열사의 주검은 이제 가족 문제가 아니고 전 국민의 일이 돼 있었다. 4월 14일 아침 김 열사의 시신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비산 자락에 시신을 실은 지프차가 도착하자 어머니와 가족들이 김 열사의 얼굴을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집안 어른과 검은색 옷을 입은 이들의 만류로 보지 못했다. 쉴 새 없는 울부짖음 속에 김 열사는 결국 차가운 땅속에 묻힌다.

하씨는 하관 당시 김 열사의 참혹한 주검을 직접 봤다고 밝혔다.

“관을 덮은 흰 천이 걷히고 땅 속으로 들어갈 즈음, 열린 관 속에서 주열이의 시신을 보았어요. 몸이 퉁퉁 부어 있고 푸른 이끼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얼굴 부위는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어요.”

하씨는 “어떤 이유로 관이 열리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 시신을 깨끗이 닦지 않고 수의조차 입히지 않은 만행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씨는 “늦게나마 국민장이 치러지는 것에 큰 감사를 드린다”며 “주열이가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것은 물론 당시 충격으로 고생하다 요절한 광열이 또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확인해 4·19묘역에 안장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주열이는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며 “김 열사는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 죽어서는 영남의 아들, 역사 속에서는 국민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다.

남원=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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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김주열 열사의 흔적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