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년, 어제와 오늘] 유일 생존 길열씨… “형 죽고난 후 집안 풍비박산”

입력 2010-04-11 23:11

1회:김주열 열사의 흔적을 찾아서

김주열 열사의 막내동생 길열(54·경기도 김포시 장기동)씨는 11일 “형이 세상을 떠날 때 네 살이어서 특별한 기억은 없다”면서 “하지만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아픈 가족사를 밝혔다.

길열씨에 따르면 주열씨 4형제 가운데 3명이 50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4남2녀 가운데 현재 영자(74) 경자(69)씨 등 누나 2명과 자신만 남았다.

김 열사의 장례를 마친 5년 뒤 당시 시골 유지였던 아버지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어머니가 하숙을 치며 자녀를 키웠다.

맏형 광열씨는 정신적 공황과 우울증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40대 초반이던 1985년 고혈압으로 요절했다. 큰형수는 1남1녀를 혼자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길열씨는 회고했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89년 돌아가셨다. 광열씨와 두 살 터울인 둘째형 택열씨도 2년 후 교통사고로 40대 중반에 사망했다.

길열씨는 74년 고교 졸업 후 대한석탄공사 말단 직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어렵게 대학과정을 마치고, 영업팀장으로 재직했다. 길열씨 가족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지역에서 5년간 어머니와 같이 지내며 병수발을 했다. 4·19가 끝난 뒤 마산시민들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면서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던 어머니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돼 고생하다 고양시 화정의 명지대병원에서 투병생활을 마감했다.

지금 살고 있는 108㎡ 아파트는 10년 전 아파트값이 쌀 때 어렵게 사들인 것이다.

길열씨는 “지금까지는 추모 행사를 해도 초청장 한번 없었지만 50년 만에 국민장을 하게 되니까 이제야 제대로 평가받는 느낌”이라며 “젊은이들이 주열형을 통해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