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록 초동교회 원로목사 90세 일기로 별세… 역사와 신앙의 ‘참 증인’ 한평생 통일 위해 헌신

입력 2010-04-11 20:45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 그래서 누구나 그 나무 밑에서 쉬고 싶어 한다.” 황금찬 시인의 표현대로 한국 교계의 거목이었던 조향록 초동교회 원로목사가 11일 별세했다. 올해 90세. “하루를 젊은 시절의 1년만큼 소중하게 쓰겠다”며 최근까지도 설교와 강연, 저술 등으로 활기차게 활동했지만 2년 전 받은 대장암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조 목사는 1920년 8월 3일 함경남도 북청군 거산면에서 태어났다. 공책 살 돈이 없어 모래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며 공부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예수를 믿고 신앙의 유산을 남겨준 부모님을 “어떤 재벌 회장보다 위대한 부모”라며 존경했다.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목사의 길을 결심한 그는 함흥과 원산의 성경학원을 나온 뒤 스무 살에 조선신학원(한신대 전신)에 입학해 송창근 김재준 목사에게 신학을 배웠다. 43년 풍상읍교회 전도사를 시작했으며 6·25 전쟁 직후에는 경남 진양에서 한얼중·고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 헌신했다.

54년 초동교회에 부임했다. 힘과 깊이가 있는 설교, 시를 비롯한 예술 전반에 대한 조예, 소탈한 인품 등으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양재모 전 연세대 총장은 “30대의 우국 청년들, 예술인 및 연예인, 조 목사의 제자들 등 세 부류의 사람들이 초동교회로 몰려들었다”면서 “어떠한 위협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위엄성,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넓은 아량과 포용력, 돈이나 사치와는 담을 쌓은 듯한 검소하고 깨끗한 사생활의 모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악인 박동진, 극작가 주태익 등 예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깊었는데 특히 시인 박목월은 생전에 “내가 많은 목사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났고 또 들어서 아는 목사님 중에 내 마음에 시 한 편으로 남는 분은 조향록 목사님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7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조 목사는 76년 국가적 혼란 속에 신학교가 위기를 맞았을 때 한신대 학장으로 부임, 국문학과 국사학 강좌를 신설해 신학생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오늘날 한신대의 기초를 놓았다. ‘생명의전화’ 운동과 모자보건법 제정 등에도 관여했다.

올해 초 인터뷰에서 2010년의 소망을 묻는 질문에 “내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던 조 목사는 평생 통일을 위해 힘썼다. 민주평통 종교분과위원장, 현대사회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한국이나 한국 교회를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하면서도 후배 목사들에게 “말씀을 꿰맞추지 말고 성경 중심으로 설교하라” “중산층 이하의 검소한 삶으로 본을 보이라”는 충고를 계속해 왔다. ‘기독교’ ‘복음은 땅 끝까지’ ‘시편강화’ ‘팔십저술’ 등 책을 냈으며 지난해에는 설교문과 수필, 시 등을 ‘조향록 선집’에 정리했다.

“복음 전파에 내 생을 바치는 데 조금도 의혹이 없다”고 늘 말해 왔던 그는 지난 9일 홈페이지(www.chr1920.kr)에 올린 설교문 ‘최후의 명령’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최후의 명령이자 유언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마 28:16∼20)처럼 이 강산 삼천리가 하나님의 동산으로 되고, 이 민중 오천만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되고, 이 나라의 모든 정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나가는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십시다!”

빈소는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02-2019-4001)에 마련됐으며 발인예배는 13일 오전 9시 초동교회에서 진행된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