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30권 완간 고은 시인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
입력 2010-04-09 18:14
고은(77) 시인의 연작시편 ‘만인보(萬人譜)’가 출판사 창비에서 전30권으로 완간됐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구상하기 시작했으니 30년 만에 대장정을 마무리한 것이다. 86년 11월 1∼3권을 한꺼번에 선보인 이래 25년 만이다.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고은 시인은 “25년간 짊어졌던 길마(소의 등에 얹어 물건을 나르는 기구)를 이제야 벗어던진 것 같다. 이제 겨드랑이에서 새 날개가 돋고 있는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겠다”고 감회를 밝혔다.
시인은 “‘만인보’ 안에는 각각 다른 시기, 다른 방향의 얼굴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산재해 있지만 그들은 하나의 명제에 갇혀 있지 않다”면서 “세상과의 약속을 나는 이걸로 지켰다”고 말했다.
‘만인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사를 만들어 온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역작으로 ‘시로 쓴 인물백과사전’ 혹은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로 불린다. 총 작품 수는 4001편이고, 등장 인물은 조연급 정도의 인물만도 5600명에 달한다.
시인은 1권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나의 만남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하잘것 없는 만남 하나에도 거기에는 역사의 불가결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인보’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 온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6권에는 ‘머슴 대길이’를 비롯해 ‘찬밥네’ ‘따옥이’ ‘찐득이’ 등 가난 속에서도 넉넉한 웃음을 간직한 채 역사를 만들어간 고향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7∼9권에서는 1950년대 고난의 세월을 살아 온 민초들의 다양한 삶을, 10∼15권에는 함석헌 이소선 장준하 문익환 박정희 이후락 정일권 등 70년대 인물들을 불러냈다.
16∼20권은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군상들을, 21∼23권에서는 4·19혁명기를 배경으로 ‘보통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24∼26권은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승(高僧)들의 행적을 다뤘다.
662편이 실린 27∼30권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국가적 폭력에 의해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절명한 사람들의 사연을 다룬 작품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당대의 인물들이나 친일행적을 비판한 시도 실렸다.
대미를 장식하는 시는 ‘그 석굴 소년’으로, 낙조 속에 태어나 버림받고 핍박받던 아이가 끝없이 읽어야 할 책이 기다리는 석굴로 들어가 영겁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은 지난해 7월 마지막 원고를 탈고한 뒤 기존 출간본까지를 포함한 모든 작품을 처음부터 일일이 점검해 역사적 사실관계와 인명 착오 등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밝혔다.
그는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만인보’의 어디에도 끝이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완간을 했지만) 어느 날 31권을 쓰고 있는 내 혼백을 누군가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인보가 더 이어질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강박적인 약속은 하지 않겠다. 이승에서의 본능이 작동할 때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진행할지도 모른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는 또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쓰고 싶어도 여건이 안돼 쓰지 못한 인물들이 있다”며 “사람의 삶은 후반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규정지어진다. 나는 내 뒤에 벼랑이 아니라 들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창비는 완간을 기념해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합본하고, 신간 27∼30권을 합쳐 11권의 양장본과 부록 1권으로 펴냈다.
또 이날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문학평론가 염무웅 도정일씨, 프랑스 시 전문지 ‘포에지’의 클로드 무샤르 편집위원, 김수형 작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만인보 완간의 의미와 작품세계 등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열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