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와우리제일교회 이용전 목사의 ‘아내 행복론’
입력 2010-04-09 13:10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화성 와우리제일교회를 찾았을 때 이용전(50) 목사는 마침 심방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 것도 잠시 이 목사는 이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성도님이 너무 심각한 상황이어서 걱정이에요.” 교회 식당 겸 카페에 자리를 잡은 이 목사는 하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목회자”라며 말문을 열었다. 직접 만든 차를 가져온 최정삼(48) 사모(그녀는 이름 때문에 20세 때 군입대영장이 나온 적이 있다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도 이 목사 옆에 앉았다.
이 목사는 철도고등학교와 철도대학을 나온 뒤 철도기관사로 근무했다. 서울∼부산 간 새마을호를 운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4년 뒤엔 기관사들이 선망하는 철도청 열차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1 때 예수를 영접한 이 목사는 성경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서원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가정 형편이 받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등록금과 직장을 보장해주는 철도대였다. 9년4개월간 몸담은 곳이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목회지’라는 생각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던 1990년, 그는 기안지에 공문서를 작성하려고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두 달간이나 계속됐다. 결국 그는 서울역 빈 객차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며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이듬해 사표를 냈다. 하지만 회사는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간부들이 찾아와 부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1년 가까이 계속된 설득에도 이 목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93년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평생 바울처럼 살겠다는 각오뿐이었다.
하지만 최 사모는 “난 목회자 사모가 될 자신이 없다”며 그를 말렸다. 엄청난 헌신을 강요하는 아버지가 부담스러워 초등학생 자녀들은 가출을 생각했다. 이 목사는 헌신을 거부하는 최 사모에게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앞만 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였다. 적어도 가족들에겐. ‘목회자가 아내한테 잘해주면 성도들에게 제대로 못해준다’는 게 당시 이 목사의 생각이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경기도 평택의 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2년이 지난 97년이었다. 설교 준비를 위해 기도하던 이 목사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회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목회는 실패한 것이다.’
이 목사는 앞이 아찔했다. 아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목회는 철저한 실패였던 것이다. “제가 불이라면 아내는 얼음입니다. 처음엔 너무 달라서 갈등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달라서 행복합니다. 차이점을 깨닫고 인정하니까 지금은 서로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15년 전 사모 역할을 할 성격도 자신도 없다던 최 사모는 이제 완전히 변했다. “딸이 목회자 사모가 되는 게 꿈이래요. 엄마를 보면 너무 행복해 보여서래요. 호호.” 딸 선미씨는 지금 총신대 신대원을 다니고 있다. 신학교에서 조교를 하고 있는 아들 슬기씨는 ‘탐정은 죽지 않는다’는 소설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목사의 아내 행복론은 이제 장로 행복론으로 옮겨갔다. ‘장로가 행복하지 않으면 목회는 실패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훼손되는 문제가 아닌 이상 이 목사는 당회원들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목회자가 빠지기 쉬운 숫자에 대한 강박감도 오래전에 버렸다. 3년 전 아파트 입주와 함께 시작된 경쟁적인 아파트 전도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는 게 하나님 보시기엔 똑같은 일 아닙니까.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기는 일이죠. 물론 오늘도 한 영혼을 위해 땀 흘리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겐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입소문을 타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꾸준하게 늘고 있다. 이 목사가 부임할 때 40여명이던 출석 성도는 지금 2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올해 와우리제일교회 목회 10년째인 이 목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냥 기존 계획대로 가는 겁니다. 다른 곳에 가려고도 않지만 그렇다고 있으려고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있을 동안엔 뼈를 묻자는 각오입니다.”
기자를 배웅하는 이 목사 부부의 얼굴에선 편안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앞만 향해 달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긴장된 얼굴이 떠올랐다.
화성=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