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은교’ 종이·전자책 동시 출간한 박범신

입력 2010-04-09 17:54


인간의 내밀한 욕망, 그 근원을 탐험하다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감히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작가의 말’에서)

작가 박범신(64)이 신작 장편소설 ‘은교’(문학동네)를 출간했다. 지난 1월부터 한 달 반 동안 개인 블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것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제목을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바꿨다.

소설은 황혼기에 접어든 노시인과 열일곱 살 여고생, 노시인의 집사 역할을 한 제자 간의 얽히고설킨 욕망과 사랑, 그로 인한 파멸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며 독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고고한 기품의 노시인 이적요가 죽은 지 1년이 되자 변호사는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하고 노트를 펼친다. 거기에는 이적요가 말년에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기록돼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가 동네에 사는 열일곱 살 여고생 한은교를 사랑했고, 자신의 제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서지우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들은 자신의 작품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변호사는 은교를 통해 서지우도 은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디스켓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변호사는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디스켓을 통해 두 사람과 은교 사이에 벌어진 일들의 실상에 접근해 간다.

평생 원고지를 고집했던 작가가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가며 쓴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다. 1993년 한 일간지에 연재하다 절필 선언을 하며 중단했던 ‘외등’ 이후 17년 만에 선보이는 연애소설이지만 흡인력은 여전하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노트에 의해 드러나는 과거와 변호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재를 오가면서 주인공들 간에 벌어진 일들을 긴장감 있게 재구성해 내고 있다.

소설은 ‘삼각 관계’를 기본 얼개로 한 연애소설이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이 작품은 오욕칠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갖가지 욕망들을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다.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온 은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성(性)에 대한 갈망을 접었던 이적요에게 불같은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룰 수 없는 갈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은교를 보는 이적요의 시선엔 되돌릴 수 없는 청춘에 대한 갈망이 짙게 배어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은교라는 존재로 인해 질투와 증오의 감정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간다.

작가는 이 소설을 폭풍처럼 썼다고 밝혔다. 천천히 쓰려고 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질주를 제어할 수 없어 단숨에 써내려 갔다고 한다. 그는 “작가로 순직하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서 빅뱅으로 터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은교’는 전자책으로도 출간된다. 중견 작가의 소설이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동시에 출간되는 첫 케이스다. 2007년 8월 네이버 블로그에 ‘촐라체’ 연재를 시작하면서 주류 작가들의 인터넷 연재에 물꼬를 텄던 그가 다시 한번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가는 길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다. 종이책과 전자책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