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미스터리’ 3D영상으로 푼다
입력 2010-04-08 18:07
천안함 침몰 14일째. 함수와 함미가 발견된 해역에서 인양 작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배는 조만간 뭍으로 올라온다. 추측의 시대는 저물고, 팩트를 찾는 전투가 시작된다.
이 전투를 위해 국방부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민군 합동조사단 합류를 요청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국과수는 지난해 도입한 ‘3D 레이저 스캐너’를 천안함 침몰 원인 조사에 투입할 방침이다. 모델명 HDS 6100. 2005년부터 사용한 단거리용 ATOSⅡ보다 개량된 중거리용 스캐너다.
국과수 관계자는 “천안함 사고와 관련된 모든 것을 3D로 재구성해 충격 실험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HDS 6100은 지름 10m 구(球)형 공간을 미세하게 회전하며 레이저로 5060번 스캔(scan·정밀 촬영)해 디지털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천안함 절단면 등 선체 내부와 외부를 촬영한다. 이 정보를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입력해 사고 상황을 재연하며 최초 충격 지점, 충격 종류와 강도를 밝히는 게 1차 목표다.
HDS 6100은 지난달 30일 강원도 삼척 시외버스 추락사고 현장에도 투입됐다.
교통사고, 3D 재구성
부산을 출발해 강원도 속초로 가던 강원여객 시외버스가 동해안 7번 국도 갈령재(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마루에 닿은 것은 30일 오전 10시48분. 왼쪽으로 완만히 굽은 길을 내려가던 버스가 갑자기 좌우로 크게 휘청했다.
운전기사와 승객 19명을 태운 버스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도로 우측 가드레일을 뚫고 높이 7m 언덕 아래로 굴렀다. 사망자 6명에는 운전기사 안모(57)씨도 포함돼 있었다.
대형 교통사고는 차량 결함인지, 운전자 과실인지, 도로의 구조적 결함인지 밝혀져야 보상이 이뤄지고 불필요한 법적 다툼도 예방된다. 운전자가 숨지면 원인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엔 스키드마크(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바퀴가 일직선으로 미끄러지며 도로에 생기는 자국)도 없었다.
“자, 지금부터 돌아갑니다.”
지난 2일 오전 11시 갈령재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 3명이 분주히 움직였다. 노란 삼각대 위에 구식 카메라 같은 기계가 놓였다. 3D 레이저 스캐너 HDS 6100. 이것저것 만지자 스캐너가 보일 듯 말 듯한 빨간 광선을 뿜더니 느릿하게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도로 모양을 3차원으로 스캔하는 겁니다.” 박종찬(47) 국과수 차량연구실장이 설명했다. “사고 원인을 알려면 사고를 재연해보는 게 가장 좋아요. 하지만 실제 차를 굴려볼 순 없으니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해 필요한 도로 정보를 레이저로 수집하는 겁니다.”
스캐너는 360도 회전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지름 10m 구 안에 있는 입체적인 모든 것을 디지털 형태로 저장한다. 0.07도 방향을 틀어 지름 10m 원을 그린 뒤 다시 0.07도 움직여 다른 원 그리기를 반복한다. 구 하나를 5060개 원으로 쪼개 저장하는 셈이다.
연구원들은 스캐너 광선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광선이 자신들을 향해 방향을 틀면 몇 발짝 옆으로 움직여 비켜선다. 스캐너가 한 바퀴 도는 데 3분 걸렸다. 지름 10m 구 하나를 완전히 촬영하면 스캐너를 10m 옆으로 옮겨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이날 훑어야 할 도로는 약 300m. 오전 8시 시작해 3시간이 훌쩍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D 시뮬레이션을 위해선 도로의 경사도, 폭, 노면상태 등 여러 정보가 필요하다. 레이저 스캐너는 이런 정보를 꼼꼼히 취합한다. 박 실장은 “도로에 붙은 껌까지 모두 스캔돼요. 길이 1㎜ 이상이면 다 잡아내죠.” 이렇게 수집한 정보량은 4∼6기가바이트나 된다.
국과수 역학연구실 조건우(40) 박사는 “3D로 재연하면 사고 당시 세세한 부분까지 찾아낸다. 시뮬레이션 분석이 완료되는 데 3∼4주 걸린다”고 말했다.
경주 버스 추락… 속도는 70㎞/h였다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언덕 내리막길에서 관광버스가 추락했다. 18명이 숨지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운전사 권모(56)씨는 “기어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국과수는 처음으로 HDS 6100을 교통사고 조사에 투입했다. 삼척 사고와 같은 방식으로 도로 정보를 수집했다. 처참히 찌그러져 스캔할 수 없는 버스는 세밀한 제원을 파악해 3D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했다.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 HVE(Human vehicle environment) 프로그램에 이들 정보를 입력하면 시뮬레이션 준비가 끝난다.
초기 주행 속도, 기어 단수, 브레이크 작동 여부 등 변수를 입력하자 HVE 프로그램이 경사도, 곡률반경도, 노면상태 등을 자동적으로 반영해 모니터 안의 버스를 언덕 아래로 달리게 했다. 실제 사고 차량 이동 경로를 따라 가상 버스는 내리막 주행과 추락을 반복한다. 사고 현장의 타이어 자국과 일치하는 자국이 모니터에 나타날 때까지 주행 속도를 조금씩 바꾸며 실험이 계속됐다(그림 참조).
시뮬레이션 결과, 버스는 언덕 마루에서 시속 30㎞로 내려가기 시작해 시속 70㎞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추락했다. 기어 조작이 되지 않아 엔진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사상자 가족들은 가드레일이 부실해 피해를 키웠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사고 지점 도로의 가드레일은 ‘시속 40㎞, 15도 각도로 충돌할 때 튕겨낼 정도의 강도’로 설계토록 규정된 것이었다. 이 규정 속도 이상의 과속(시속 70㎞)으로 충돌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는 분쟁이 확대되는 걸 막아줬다.
균열 시작 지점을 찾아라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은 동강난 함체의 절단면 분석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선 미시적 분석이 필수다. 부서진 단면을 실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한 차례 큰 충격에 갈라졌는지, 미세 균열로 서서히 쪼개졌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 사고 같은 대규모 파손은 어느 부분을 현미경으로 봐야 할지 찾아내는 게 문제다.
박 실장은 “천안함 절단면을 모두 현미경으로 분석하려면 1∼2년 걸릴 수도 있다. 3D 시뮬레이션으로 여러 조건을 입력해 파괴 실험을 하다 보면 정확히 어느 부분에 힘이 가해졌는지 파악된다. 충격 시작점이 나오면 조사 시간이 단축된다. 균열 시작 지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천안함을 인양한 뒤 레이저로 스캔해 얻은 내·외부 선체의 디지털 정보를 천안함 제원과 함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모의 충격 실험을 반복하면 함정의 어느 부위에, 어느 정도 충격이, 어떤 형태로 가해졌는지 알 수 있다.
단거리용 3D 레이저 스캐너 ATOSⅡ는 2006년 연쇄살인범 정남규 검거에 사용됐다. 당시 연쇄살인 사건으로 수사 방향이 잡힌 건 여러 피해자 시신의 상처가 같은 도구에 의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시신 상처들을 모두 ATOSⅡ로 스캔해 일일이 대조한 결과였다.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HDS 6100을 요인 경호에 활용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회의장을 레이저로 스캔하면 어느 지점에서 어떤 각도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지 가려진다. 국과수는 드라마 ‘아이리스’의 마지막 총격전을 촬영했던 서울 문정동 가든파이브에서 지난달 레이저 스캔으로 경호작전을 세울 수 있는지 실험했다. 결과는 조만간 경찰과 국가정보원에 통보된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이런 장비가 있었다면 몇 층 어디에서 총을 쐈는지 정확히 규명됐을 겁니다.” 과학수사도 3D 시대다
삼척=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