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스펙 플루

입력 2010-04-08 17:39


고려대 김예슬 학생이 자퇴의 변을 밝힌 대자보 이후 대학가 곳곳에서 대자보가 나붙고 있다. 골자는 지금의 대학 교육이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상아탑이 가진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대기업에 납품할 규격에 맞는 공산품을 제작하는 대학 교육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김예슬씨 주장은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싼값에 노예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스펙 플루’, 이른바 스펙병에 걸린 대학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나마 그가 명문대생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그를 향해 ‘운동권 경력을 쌓기 위한 정치적 액션’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난 유치한 영웅심리’라며 모질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그가 그저 그런 학교 학생이었다면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것이다. 코웃음은커녕 ‘반수(半修)하려고 관두는 거 아냐’ ‘그래 그 학교 나와 봤자 어차피 비전도 없는데 잘했어’ ‘괜히 좋은 학교 못 간 게 억울하니까 말이 많다’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넘겼을 게다. 아마 교무과 직원이 자퇴원에 도장 쾅 찍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는 나지 않았을 것이 지금의 서글픈 한국 현실이다.

젊은 애들이 조용히 있지 않고 뭐라도 하면서 시끄럽게 구는 것이 사회적 측면에서 발전적인 일일 텐데, 요즘 애들은 참 얌전하고 조용하다. 젊은이들이 꼭 대학생인 것은 아니지만 대학 진학률이 85%에 이르니 일단 널린 게 대학생이라고 봐야 하는데 얘들 참 조용하게 열심히 살기만 한다. 인기 있는 수강 과목을 미리 신청해 뒀다 사고팔기까지 하면서 일찌감치 상거래 룰까지 습득한 이들은 몸을 납작 낮추고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스펙을 그러모으고, 그러면서 안전한 기업에 ‘간택’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또 어른들은 얘들에게 화를 낸다. 요즘 젊은것들, 용기가 없다, 야망이 없다, 작은 회사는 안 가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용기가 없고 야망이 없고 비리비리한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함부로 나서면 너만 다친다’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직장 들어가 무난한 배우자 얻어서 남들만큼 사는 게 좋은 거’라고 배웠다. 험한 일 하지 말고 몸 사리고 큰 회사 가라고, 그게 잘되는 길이라고 배웠다. 지금 천안함 사건을 의논하고 있는 공직자들도 제 자식은 군대 안 보내거나 외국 유학 후 연줄 기업에 취직시키는 식으로 꼭 쥐면 깨질세라 고이고이 길렀으면서 남의 자식들보고는 험한 일 싫다 한다, 궂은 일 마다한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남의 자식에게 화를 내고 있다. 요즘 젊은것들 참 이상도 하지, 이해를 못하겠어, 참 내 자식은 빼고, 걘 달라, 곱게 큰 애야…. 이런 이중 잣대가 해소되지 않는 한 참다못한 학생들의 대자보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고 잠이 든 학생들의 신음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요새 젊은 것들을 향한 불평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