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의 깜짝 한수] 하이원배 명인전 예선 ● K 초단 ○ L 4단

입력 2010-04-07 17:29


쏟아지는 햇살에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오랜만에 해가 뜨는 시간과 같이 시작하니 또 다시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매일 매일이 새롭다더니 요즘은 그렇게 매일 다른 내가 태어나는 느낌이다. 하루가 아침 점심 저녁 세부분으로 나눠지듯 인생도 쪼개어 보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에 어느새 나는 장년기 속에서 다시 유년기를 맞고 있다. 다시 시작되고 있는 이 시기는 또 다른 혼란과 낯선 느낌을 주지만 역시 아장아장 걸음마 단계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다.

이번에 소개할 수는 프로 시합 어느 예선전의 바둑이다. 한쪽이 결정적인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골라봤다. 초반 흑의 방심과 무거운 행마로 백이 아주 편하게 흘러가고 있다. 불리한 흑은 연신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는데 그 승부수에 한 순간 백은 흔들리며 무너졌다.

우선 참고도를 보자. 백1로 막으면 흑은 우변과 하변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 하변을 선택해 흑2로 두었을 경우 백3으로 뻗어 흑4로 잡을 수밖에 없을 때 백5∼9까지 쪼여 붙여 하변은 딱 보기에도 탄탄한 백의 진영으로 굳어져 승부 끝이다. 중앙의 백 대마는 a와 b의 곳이 선수로 들어 탄력적인 모양으로 쉽게 타개된다. 이 변화를 선택했으면 알기 쉽게 백의 승리였다.

하지만 실전에서 백의 선택은 백1로 흑 석 점을 잡았다. 나름대로 알기 쉽게 둔다고 둔 이 수가 한순간에 보따리마저 내놓으며 오히려 쫓기는 신세로 바뀌게 된 느슨한 수였다. 실전 흑2,4를 선수로 당하고 흑6을 당하자 적반하장으로 하얗게 되어 있어야 할 백의 진영이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때부터 당황한 백은 심적으로 심하게 흔들리며 뒤늦게 백7로 두어보지만 흑8로 받아 또 한 번 손해를 봤다. 이제라도 마음을 추스르며 냉정한 형세판단을 하고 수를 찾았더라면 두어 볼만한 형세였다. 하지만 큰 실수를 했다는 심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자포자기 해버렸다.

바둑과 인생도 때를 잘 알아야 한다. 그 때를 놓치고 나면 뭔가 석연치 않은 모습이 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잘못을 알았을 때라도 되돌릴 수 있는 때를 알아챈다면, 그때라도 올바른 길로 바로잡을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이미 엎지른 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 바둑이고 인생인 것이다.

이영신<프로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