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4) 시아버지 손정도 목사, 복음화·독립·동포에 헌신
입력 2010-04-07 17:23
나는 시아버지 손정도(1872∼1931) 목사님을 한번도 뵌 적은 없다. 그러나 목사님께 감동을 받은 주변인들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손 목사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홍리로, 그 일대에서는 잘 알려진 명문가요 부농이었다. 완고한 유교적 집안에서 태어난 손 목사님은 23세 때 평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갔다가 조씨 성을 가진 목사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됐다. 조 목사님은 당시 시아버지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세계 각국의 문화를 밤새도록 들려줬고, 그날 밤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먼저 상투를 자르고 집안 대대로 모셔온 사당을 몽둥이로 다 부수었다고 한다. 이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고 결국 쫓겨난 손 목사님은 고학으로 숭실중,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시어머니는 기독교 병원 잡역부로 일하며 시아버지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시어머니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곤 했다. “부유하게 살던 예전의 삶보다 비록 당시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렸기에 그 삶이 더 감사하고 행복했어.”
손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은혜로운 말씀과 뜨거운 애국심, 진심이 깃든 언행으로 부흥을 일궈냈다. 또 지역에선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다보니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됐다. 한번은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 음모사건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혐의는 벗었으나 전남 진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목사님은 그곳에서도 복음과 나라 사랑의 감동을 전했다.
이후 서울 동대문교회, 정동교회에 부임한 손 목사님은 그때부터 청년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그분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청년이 3·1 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였다. 1918년 겨울, 목사님은 정동교회에서 시무한 지 3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듬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의정원 의장에 바로 손 목사님이 선출됐다. 목사님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을 당한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상하이에서 보살폈고, 여러 방면에서 독립활동을 지원했다.
21년 지린(吉林)으로 떠난 손 목사님은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오갈 데 없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줬다. 동포들의 억울한 사정을 도맡아 중국 관청에 출입해 변호도 해줬다. 지린 일대에 동포들이 함께 모여 살기를 원하자, 고향 강서군 땅들을 모두 팔아 지린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곳에 세운 길림기독교회는 바로 하나의 ‘이상촌’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대규모 농장을 통해 만주 한인들의 생활터전을 삼았을 뿐 아니라 이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곳에 바로 숭실중 동창이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김일성)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수첩에 손 목사님의 이름과 주소가 있는 것을 보고 온 것이다. 목사님의 보살핌을 받던 18세 김성주는 교회청년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후에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손 목사님을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할 정도로 존경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추운 겨울 만주 땅 지린에서 49세의 젊은 삶을 마감했다. 가족의 간호 한번 받지 못하고 외롭게 주님 품에 안겼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