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열일곱 소년, 日 패망 한달 앞두고 와니시제철소서 폭사
입력 2010-04-06 18:28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② 일본제철, 철을 녹여 포탄으로
63년 만에 유골과 함께 돌아온 사진 속 소년의 눈매는 가늘고 길다. 모자 아래 짧은 귀밑머리는 솜털 같은 느낌이다. 1943년 4월 고향 경남 사천에서 일본 홋카이도 남부 무로란(室蘭)시 와니시(輪西) 제철소로 끌려온 구연석은 열다섯 살이었다. 훈련생 신분으로 기차 신호수 일을 맡았다. 성인이 아닌 소년이었기 때문에 ‘노무자’가 아닌 ‘훈련생’이었다.
소년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작은 수첩에 일기를 썼다. 꼼꼼히 펜을 눌러 홋카이도 전도(全圖)를 그리기도 했다. 일기는 1945년 7월 3일에 멈췄다. ‘밤 1시 반경 느닷없이 무로란에 경보 발령. 2시경 공습경보 발령.’
7월 15일 무로란만(灣)에는 불벼락이 내렸다. 오전 8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60분간 직경 40㎝, 길이 1.5m의 포탄이 비 오듯 떨어졌다. 860여발의 포탄은 태평양 해상에 진주한 미 해군 미주리함과 아이오와함에서 발사됐다. 처음 30분은 일본제강, 후반 30분은 일본제철 와니시 제철소를 향했다.
소년 구연석은 다른 조선인 훈련생 4명과 함께 제철소 내 작업장에서 폭사했다. 모두 15∼17세였다. 일본 패망을 꼭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희생된 소년들의 유체는 화장돼 인근 사찰에 방치됐다. 이들 중 3구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반세기 넘게 걸렸다.
와니시 제철소에서 무로란 제철소로
지난달 2일 무로란시의 하쿠초(白鳥) 대교에 오르자 신일본제철 무로란 제철소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로란만은 제철소와 제강소, 정유시설 등이 들어선 군산복합 지역이다. 지금도 그렇고 일제 강점기에도 그랬다. 이곳에서 생환한 주인출(82·경남 김해) 할아버지는 제철소 규모를 묻는 질문에 “두루 80리”라고 답했다. 담장 길이만 수십㎞였다는 기억이다. 실제 제철소 면적은 418만㎡다. 회사 쪽 설명으로는 도쿄돔의 86배 크기다.
무로란 제철소는 1951년 이전까지 일본제철의 와니시 제철소였다. 와니시 제철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후쿠오카(福岡)현 야하타(八幡) 제철소에 이어 일본 내 2위의 무쇠 생산량을 자랑했다. 홋카이도 각지에서 캐낸 석탄과 철광석은 이곳 남쪽 갈고리 모양의 만(灣)으로 집결해 일제의 대륙 침략 무기로 변신했다. 1945년 8월 광복 때 와니시 제철소에는 모두 2248명의 조선인 공원이 있었다.
향토사학자 우에노 시로(80) 선생은 “1942년 5월부터 미성년 공원이 포함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끌려와 이듬해 1년 만에 1130명을 기록했다”며 홋카이도 경시청의 노무배치 정보 문건을 근거로 들었다. 매달 100명씩 나이를 가리지 않고 조선에서 징발된 소년들은 제철소 담장 밖 철길 옆 협화료(協和寮)에서 생활했다.
일본과 협력(協)하고 화합(和)하라는 뜻에서 만들어준 숙소에는 침실 1개당 10여명이 수용돼 칼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100여명이 머무는 한 채의 목조건물 안에 침실과 식당, 변소, 사무실이 모두 들어 있고 출입문은 한 개뿐이었다. 창에는 창살이 달려 있어 사실상 구금 상태였다.
우에노 선생에게 신일본제철이 무로란에서라도 전향적 조처를 취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가해자로서 전후에도 한 게 전혀 없어요. 신일철(신일본제철) 간부들에게 강제동원 문제를 제기하면 ‘그건 옛날 일철, 지금은 신일철이다’라는 대답이 녹음기처럼 돌아옵니다.”
지켜지지 못한 일본 정부의 약속
일본 기업뿐 아니라 일본 정부도 유족의 바람을 저버렸다. 본보 취재팀이 최근 도쿄 소재 총련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으로부터 입수한 일본 외무성 기밀해제 마이크로필름 사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대신 비서관/ 북동아시아과/ 소화(昭和) 41년 7월 14일
(중략) 6. 일한회담이 타결을 본 오늘, 문제가 되고 있는 도모도 에이이치(구연석의 창씨명)에 대해서는 물론, 다른 유골 3위에 대해서도 그 유족을 확인하고 모든 유골 인도를 완료할 것.’
1966년(소화 41년) 내각 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와니시 제철소에 끌려와 사망한 조선인 소년들의 유골 처리에 관해 참의원 의장의 질의를 받았다. 당시 외무성 북동아시아과에서 작성해 총리 비서관에게 보낸 답변 자료가 바로 이 문서다. 한일회담이 (1965년) 타결됐으므로 소년들의 유골을 돌려보내겠다는 다짐을 밝히고 있다.
일본 정부를 움직이게 한 이는 구연석의 아버지였다. 1963년 아버지 구성조씨는 아들의 뼛조각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펜을 들었다. 전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앞으로 세 차례 편지를 보냈다.
“(제 아들)구연석은 훈련생으로 운전과 근무 중 1945년 7월 중순에 전사(당시 17세)하였습니다. 그때 전보를 받았습니다만 같은 해 8월 15일 대동아전 휴전조약에 의해 오늘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은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유골 4구 가운데 1구만 1970년대 민간의 도움으로 반환됐다. 구연석을 포함한 3구의 유골은 계속 일본에 남아 있다가 2008년 2월에야 고국 땅을 밟는다. 일본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을 보다 못해 대신 나선 서울 봉은사 명진 스님과 일본 시민단체에 의해서다. 편지를 썼던 구성조씨는 아들의 뼛조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외무성 문서는 1945년 10월 일본제철 직원이 소년들의 유골과 위로금을 가지고 홋카이도 남부 하코다테(函館)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갔으나, 미군이 상륙을 불허해 다시 귀환했다고 기록했다. 소년들이 받지 못한 미지급 임금 2400엔가량은 무로란에 진주한 연합군 총사령부(GHQ)에 넘겼다고 돼 있다. 이는 일본제철의 후신 신일본제철이 책임을 회피하는 주된 변명으로 이용된다.
무로란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현 일본 총리의 지역구다.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하토야마 총리는 지난 1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세기를 넘어서는 큰 고비를 맞은 올해, 과거 부(負)의 역사에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에 대한 직시 의지를 강조한 것이지만 아직 일본 정부 차원의 가시적 조처는 없다. 그의 선언이 전임자들처럼 허언(虛言)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지역구인 무로란에서부터 매듭이 풀려야 하지 않을까.
무로란(홋카이도)·도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