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 바이블] 자살자 유가족은 생존자이다

입력 2010-04-06 23:14


가족 읽은 상실감보다 큰 죄책감을 아는가?

탤런트 최진영씨가 자살했다. 그의 누나 최진실씨가 자살한지 1년 여 만에 동생이 또 자살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남매가 어릴 적 고생하며 자라고, 서로 우애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더니 누나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 같다. 그러한 이야기를 알아서인지 아니면 고 최진실씨가 국민배우로서의 많은 사랑을 받아서인지 동생의 자살이 더욱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보통 자살한 가정에서 또 다른 자살자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전적 이유를 찾기도 하고 가정의 환경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둘 다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다.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과에서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에 신체적 유전일 수 있다. 그리고 우울의 원인이 가정의 환경에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역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영향은 아무래도 가족을 잃은 상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병사나 자연사를 해도 그 상실감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게 되면 아무래도 그 상실감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 중에서 자살자가 있다면 자살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살한 사람의 유가족을 영어로 ‘서바이버’라고 부른다. 즉 생존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가족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동일하게 자살로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살의 위험에 극명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예방에서는 이러한 유가족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 주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을 위로하고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녀가 자살로 죽은 경우 그 부모에 대한 배려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오래 동고동락했던 노부부의 경우에도 이러한 배려가 필요하다. 노부부 중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 곧 남은 배우자가 돌아가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 자살이라고 추정할 정도이다.

한국은 특히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는 성향이 있다. 가족 중에서 자살한 사람이 나타나면 주변에서 ‘오죽했으면’ 자살했겠느냐는 뜻 없는 비난이 나오기 십상이다. 자신이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자살까지 했겠느냐는 질문이 스스로에게도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실감과 죄책감이 엇물린 상황에서 마음을 치유하고 돌아설 수 있기까지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유가족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생명의전화나 서울시광역정신보건센터 등 몇몇 기관에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지만 알려지지가 않아서 당사자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정황 속에서 자신이 알아서 그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국가적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선진국에서는 반강제적으로 유가족들을 격리해 치유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정도는 아직 되지 못할지라도 한국에서도 이들에 대한 국가적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교회 역시 이들에 대한 배려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최진실씨가 자살했을 때도 그가 기독교인이었기에 안타까움이 심했는데 그 동생 최진영씨 역시 교인이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회가 자살한 사람들에 대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정죄한다면 그 유가족들을 끊임없이 우울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그러한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찾고 공동체의 쉼을 원하는 가족들을 교회가 품지 못하고 죄인으로 내친다면 교회는 생명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음을 만들어내는 죽음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하루에 3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교회는 먼저 이러한 유가족들에 대한 배려로 천하보다도 귀한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공동체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