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3) 죽음 앞둔 여고단짝 위해 ‘작별의 찬송’
입력 2010-04-06 17:17
구와하라는 서울에서 지내다가 몸이 아파 휴양차 마산으로 이사왔고,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됐다. 서로 마음이 통했던 우리는 고교시절 내내 붙어다녔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와서 우리 둘은 소풍 대신, 마산 바다 모래사장으로 놀러가곤 했다.
“은혜야! 너는 노래를 부르렴. 나는 네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릴게.”
구와하라는 내가 불러주는 노래를 참 좋아했다. 특히 찬송가를 불러주면 흥얼흥얼 곧잘 따라부르곤 했다. 우리 둘의 우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마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마산에서 지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유학와 기숙사생활을 하게 됐다.
대학생이 된 어느날, 구와하라에게 “보고싶다”는 전화가 왔다. 힘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반가운 마음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앞섰다. 빨리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내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하는 구와하라의 얼굴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지 마, 은혜야. 나 괜찮아.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고 싶어. 나를 위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해줄 수 있겠니?”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동무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애써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고 밝은 모습으로 찬송을 불렀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하나님께 구와하라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내가 가는 길에는 하얀 들국화가 많이 피어 있어. 친구야, 행복하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잘 있어, 은혜야.”
그 말을 끝으로 구와하라는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눈을 감았다. 친구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펑펑 쏟아졌다. 그녀와 헤어진 뒤 나는 오히려 더 열심히 학교생활에 집중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이화(梨花)는 ‘맑고 고귀한 하얀 배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내가 머물렀던 기숙사는 진선미 관이었다. 학생 수는 모두 300명으로, 영문과 음악과 가사과 보육과 등 총 네 과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음악과에 진학했다.
교복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복장이었다. 교복으로 양복만 입다가 한복을 입으니 처음에는 참 어색했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졌다. 김활란 당시 총장님의 또렷한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화의 교문을 들어선 여러분은 오늘부터 기독교 정신 아래 진선미의 이화를 잘 익히고 배워서 장차 우리 한국 사회와 가정에 아름다운 이화의 향기를 펼치는 자랑스러운 여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입학생 중에는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님의 따님인 손인실 학생도 있었다. 김 총장님은 “손 목사님은 참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우리 앞날의 갈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도 큰 영향을 받게 해주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
문득 손인실이라는 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듣게 된 이름 ‘손정도’. 그분이 미래의 시아버지가 될 줄이야.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