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하나님] 유종국 솔로몬산업 대표·어린이재단 후원회부회장
입력 2010-04-06 19:54
왼쪽 눈 실명 위기에서 새 인생 눈 떴다
1955년 강원도 속초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사격장에서 탄피를 줍다가 폭발 사고로 손목이 잘린 형을 대신해 10대 중반에 가장이 됐다. 목수 일을 하던 실향민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셨다.
사춘기 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쥐약을 먹었다. 다행히 교회에 다니던 옆집 형이 나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기는 바람에 살아났다. 그 형을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내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군에 갈 때까지 오징어 배를 탔다. 그 돈으로 두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재수 끝에 해양경찰순경(의무전경) 시험에 합격했다. 중졸은 나뿐이었다. 자격지심에 더 열심히 훈련받아 6등으로 졸업했다. 좋은 근무지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고향 속초해양경찰서 근무를 지원했다. 해양훈련을 하던 중 오른쪽 팔목 골절상을 입었다. 그 사고로 육지에서 근무하게 됐다. 속초해경서장 부속실에 근무할 때는 얼굴에 백반증이 생겼다. 흉하게 변한 얼굴은 내 믿음을 더욱 강하게 했다. 1년 동안 동료 13명을 전도해 속초중앙교회 전도왕이 됐다. 제대할 무렵엔 백반증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목회자가 되라”는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동대문 주변에서 낮엔 막노동을 하고 밤엔 조그마한 독서실에서 살면서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은 방 한 칸도 없는 나에게 ㈔한국청년회의소(JCI) 백정환 사무총장을 만나게 해주셨다. 교회 장로인 그분은 나를 사무국 간사로 일하게 했다. 이후 외환은행에 다니면서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양대 행정대학원을 나와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환경 최고전문가 과정까지 수료했다.
생활이 좀 나아지자 욕심이 생긴 탓일까.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의 모 의원을 도와 선거운동 참모 활동을 하다 비서관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구 모 인사의 상갓집에 다녀왔다. 그런데 의원 부인이 그냥 들어오게 할 수 없다면서 소금을 뿌리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민할 때라 사표를 던졌다.
비서관을 그만둔 후 10년간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가 40대 후반 친구 회사에서 영업담당 부사장을 맡았다. 2003년 1월부터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1000일 동안 새벽기도를 드렸다. 2006년 1월. 마침내 억대의 빚을 모두 갚았다. 그러나 기쁨은 단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밤늦게 귀가하다가 그만 빙판길에 미끄러져 왼쪽 눈을 크게 다쳤다. 한 쪽 눈을 잘 보이지 않게 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주셨다. 방음벽, 도로변 안전 난간 등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전문 건설업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겸손과 지혜’로 기업을 경영하자는 뜻에서 회사 이름을 ‘솔로몬산업㈜’(solomonok.com)으로 했다. 회사는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벤처기업 인증, 우수제품 생산으로 조달청, 중소기업청 등록 기업이 됐다.
하나님은 그늘지고 힘든 이웃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내게 아직도 시련을 주시는 것 같다. 평생 힘들게 살았던 형님은 지금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다. 스물 셋이 된 지적장애 딸은 아직도 초등학생 수준이다. 다행히 착하고 의젓한 아들은 여동생 치유를 위해 연세대 물리학과 합격을 포기하고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사회복지 상담학을 전공했다. 지난해 말 공군학사장교로 임관한 아들은 틈나는 대로 집으로 와 여동생을 돌본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꿈꾸는 목표에 주춧돌을 놓은 것 같아 흐뭇하다. 치유상담학을 전공 중인 아내와 함께 장애아동 시설 전문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우리집 목표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