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河東의 소탐대실

입력 2010-04-05 18:01


경남 하동은 더 이상 옛날의 하동이 아니었다.

봄비에 매화꽃이 지고 벚꽃이 피기 시작한 지난 주말. 지리산과 섬진강으로 대표되는 하동의 산하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찻길로 꼽히는 19번국도 주변은 온통 파헤쳐져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산과 강은 나날이 여위어가고 있었다.

‘하동포구 팔십리’ 중 훼손이 가장 심한 곳은 19번국도 확장공사가 한창인 하동읍∼평사리 구간. 굴착기가 매화와 벚꽃, 그리고 배꽃이 번갈아 피고 지는 꽃길을 넓히기 위해 산을 깎아내고 섬진강 둔치를 메우느라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해마다 벚꽃 관광객들로 교통정체가 반복되자 길을 확장해야 한다는 개발논리와 벚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국도를 넓히면 안 된다는 주장이 수년간 팽팽하게 맞서던 곳이다.

결론은 ‘꿩 먹고 알 먹기’로 났다. 19번국도 확장구간 설계변경을 통해 벚나무도 보호하고 비록 한철이지만 교통체증을 완화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럴듯한 구상이다. 하지만 확장구간 중 일부가 섬진강 둔치에 바싹 붙어 생태와 경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었다. 벚나무는 새로 심으면 수년 혹은 수십 년 후 다시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한번 훼손된 산과 강은 복원이 불가능하다.

4차선 확장이 지역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미 많은 지자체들이 국도가 확장되고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관광지로 전락하고, 지역민들은 인근의 더 큰 도시로 쇼핑을 가는 바람에 지역경제가 더욱 악화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영국 등 관광선진국들이 유명 관광지로 가는 길을 확장하지 않는 이유다.

지리산과 섬진강 경관을 훼손하는 무분별한 건축허가도 문제다. 10년 전만 해도 한 폭의 그림 같던 섬진강변은 우후죽순 들어선 모텔과 음식점들로 대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 더욱 가관은 생태 보호에 앞장서야 할 하동군이 생태과학관을 짓기 위해 고소산성 아래 지리산 기슭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생태 중요성을 교육하기 위한 건축물이 지리산과 섬진강의 경관을 해치는 아이러니를 하동군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동은 수려한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끼고 있는 수채화 같은 고장이자 질곡의 근현대사에서 상처받고 신음한 민초들의 고향이었다. 덕분에 고은 고정희 곽재구 김지하 도종환 문병란 박재삼 서정주 신동엽 이은상 정호승 김동리 김주영 김훈 문순태 송기숙 윤대녕 이병주 이태 조정래 황순원 박경리 등 수많은 문인들이 하동을 시나 소설의 배경지로 삼았다. 이는 관광하동을 견인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가상공간 최참판댁에 관광객들이 사계절 줄을 잇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동군은 관광을 더욱 활성화할 욕심으로 관광객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는 관광자원 훼손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하동군이 관광하동으로 거듭나려면 도로를 넓히고 건축허가를 남발할 게 아니라 19번국도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선 간판을 정비하고 경관을 해치는 ‘전봇대’를 뽑는 일이다. 이를 위해 모텔과 음식점을 섬진강변 뒤로 물러나게 하는 등 관광백년대계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하동군은 목포시가 지난 10년 동안 수천억원을 들여 개발의 상징인 삼학도를 복원한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모텔과 음식점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강 건너 광양 매화마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유도 눈치 채야 한다. 이대로 가면 수십 년 후 아니 수년 후에 지리산과 섬진강을 복원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하동의 산하가 망가져도 관광객들은 여전히 19번국도를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 건너 백운산 품에 안긴 고즈넉한 풍경의 광양 산하를 찾으려면 뻥 뚫린 19번국도를 이용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자칫 꿩도 잃고 알도 깨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강섭 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