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2) 태어난 날 해갈의 단비… ‘은혜’로 작명
입력 2010-04-05 17:53
1917년 여름, 경남 마산은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갔다. 3개월 동안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삭의 몸으로 한 여인은 그들 틈에서 속삭이듯 기도했다.
“하나님, 비를 내려주셔서 농사를 잘 짓게 해주세요. 그리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해주세요.”
8월 11일, 그 여인은 예쁜 딸을 출산했다. 그날 밤부터 반가운 빗소리도 들렸다. 여인은 남편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예요. 이 비도, 우리 아이도.”
홍은혜. 나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독실한 믿음의 집안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종종 잠자는 내 머리 맡에서 찬송가 262장(통 196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부르시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새벽예배에 자주 가곤 했다. 약골이었던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한두 차례 꼭 심하게 병치레를 하곤 했다. 몸이 아파 새벽에 잠을 이룰 수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낫지 않을까?’란 생각에 새벽에 혼자 기도를 드렸다. 그럼 주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깨끗하게 치료해주셨다.
그렇게 기도 응답을 받은 뒤부터 나는 늘 기도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아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드렸다. 등교하기 전 먼저 교회에 들러 예배를 드렸다. 새벽제단을 매일같이 쌓다보니 어느새 내 몸과 마음은 건강해졌다.
당시 우리 가족이 다닌 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마산의 문창교회였다. 1901년 마산에는 아담슨 선교사와 로스 선교사가 각각 세운 교회가 있었다. 1903년 이 두 교회가 통합해 마산교회가 되었고, 1916∼19년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마산의 옛 이름인 문창을 사용해 문창교회가 된 것이다.
주 목사님은 31년 문창교회 5대 목회자로 부임하셨다. 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가셨으니까, 나는 15∼20세 때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창 믿음을 키웠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참 잘하셨다. 인근 유학생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우리 교회를 찾을 정도였다. 또 주 목사님은 찬송도 많이 부르셨다. 목사님 덕분에 나는 일찍부터 좋아하는 찬송을 가슴에 품었다.
그때 내가 즐겨 불렀던 찬송은 ‘내 진정 사모하는’(찬송가 88장)이었다. 가끔 내가 이 찬송을 부르면 주위에서 “성악가 시켜도 되겠다”고 칭찬해줬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래서 가끔 예배 때 혼자 특송을 부르곤 했다. 어쩌면 그 시절부터 나는 음악가로의 꿈을 키웠는지 모른다.
아이다 맥피 선교사가 초대 교장을 맡았던 의신여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마산고등여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일제 시대였던 그때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한 반에 50명이 정원이었는데, 일본 학생이 45명, 한국 학생이 5명이었다. 나는 일본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특히 노래를 잘해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매년 독창회에 나가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인지 나를 ‘조선인’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랑스러운 단짝 구와하라 상을 만났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