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피플-박병엽 팬택 부회장] “청춘 바친 회사 5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만들고파”
입력 2010-04-04 20:02
3년 전 “다시 실패할 경우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깨끗하게 사라지겠다”고 했던 박병엽(48) 팬택 부회장은 지금 사라지지도 않았고 형편이 구차하지도 않다. 죽기 살기로 회사 회생에 매달린 결과다.
그야말로 집념의 사나이다. 자수성가 기업인의 대표주자로 승승장구하다 2007년 4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쓰러지는가 싶더니 연속 흑자를 내며 보란 듯이 일어서는 중이다. 올해 1분기까지 포함하면 11분기 연속 흑자행진이다. 지난달 채권단은 워크아웃 기업 최고경영자(CEO)인 박 부회장에게 회사 발행 주식의 10%에 대한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줬다. 개인 지분을 모두 내놓고 백의종군해온 박 부회장에게 회사를 다시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다만 2012년 이후 회사 가치를 지금보다 2∼3배는 끌어올려야 스톡옵션 행사가 가능하다.
지난 2일 서울 상암동 팬택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박 부회장은 청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다. 공식일정 없이 혼자 있을 때 입는 간편복이란다. 기자가 “스티브 잡스(청바지를 즐겨 입는 애플 CEO) 같다”고 했더니 “잡스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큰일 났는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잡스가 아이폰으로 휴대전화 시장 판도를 뒤흔든 것을 빗댄 농담이다.
안 그래도 3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박 부회장은 애플 때문에 한숨 돌릴 틈이 없어졌다. 그는 “이 정도 되면 탄력이 붙어 쉬엄쉬엄해도 돼야 하는데 판 자체가 뒤집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익이 일반 휴대전화에서 스마트폰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구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MS) 등 휴대전화와 상관없던 글로벌 강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스마트폰 시장에 덤벼들고 있기 때문이다.
박 부회장은 최근 내부 개조 작업에 돌입했다. 조직 정비와 함께 6개월에 걸쳐 끊임없는 토론과 정신교육을 통해 과거 습성을 깨는 작업이다. 박 부회장은 “3차원(3D) 열풍은 입체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시대가 왔음을 뜻하고 아이폰의 성공은 전 세계에 깔려 있는 자원을 조합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조직 전체에 입체적 사고와 외부 자원 활용을 주문하고 있다.
당초 2100억원으로 잡았던 올해 연구개발(R&D) 및 시장개척 비용도 3000억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판국에 R&D가 전년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달 말 안드로이드폰 ‘시리우스’를 출시, 스마트폰 전쟁에도 본격 가세한다. 지난해부터 개발한 시리우스는 3.7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 화면에 퀄컴의 1㎓급 프로세서인 스냅드래곤을 장착한 고사양 제품이다. 팬택은 올해 시리우스를 포함해 6∼7종의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을 예정이다.
박 부회장은 휴대전화 외에 다른 모바일 기기도 준비하고 있다. 애플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더욱 거세지고 있는 모바일 인터넷 혁명에 대응하는 차원이다. 조만간 첫 작품을 선보인다.
박 부회장은 “호황은 좋다. 하지만 불황은 더 좋다. 모든 것이 암흑이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다“고 말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처럼 역경을 딛고 일어선 기업인을 좋아한다. 박 부회장 본인도 입지전(立志傳)을 쓰는 중이다. 지방대를 나와 1987년 맥슨전자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29세이던 1991년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4000만원으로 팬택을 세웠다. 이후 현대큐리텔과 SK텔레텍을 인수했고 한때 세계 7위 휴대전화 업체로 올라섰으나 무리한 사업 확장과 글로벌 기업의 견제로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고 긴 고통의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박 부회장은 “지금까지 20년 청춘을 바친 팬택이 5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엔 빛바랜 A4지가 여러 장 붙어 있다. 그가 화장실 소변기에서 본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와 같은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속이 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본다고 한다. 그는 “아직 종교는 없지만 최근 릭 워런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틈틈이 읽고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