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세요?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입력 2010-04-02 17:39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 신작 ‘숨그네’ 출간
강제수용소.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곳. 삶과 죽음의 경계. 항상 붙어있는 배고픔과 추위의 존재를 미화시키지 않는 한 고통과 슬픔이 너무 커 숨조차 쉴 수 없는 곳. 그래서 소설의 제목은 ‘숨그네’다. 인간의 숨이 그네처럼 흔들리는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하는 ‘숨그네’.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57·사진)의 신작 ‘숨그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한국에서 출간된 그의 사실상 첫 작품이다. 1982년에 펴낸 데뷔작 ‘저지대’도 함께 나왔다.
‘숨그네’는 뮐러가 자신처럼 루마니아에서 망명한 독일계 시인이자 실제 우크라이나 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1927∼2006)의 구술을 바탕으로 썼다.
소설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지배를 받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기 위해 루마니아에 사는 독일인들을 징집해 강제 노동을 시킨다. 17세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도 징집된다.
그는 떠나는 날 할머니로부터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듣는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은 레오 안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돌아왔으므로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17쪽) 작품에는 석탄 캐기 나무 심기 자동차 정비 등 수용소에서 하는 업무와 일과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세세하게 묘사된 하루와 그 하루가 쌓이고 쌓이는 5년의 수용소 생활을 지배하는 건 배고픔이다. 남의 빵이 더 커 보여 먹기 전 수없이 빵을 바꾸는 빵의 덫부터, 일반 도덕은 끼어들 틈 없는 빵의 정의(正義), 늘 거기에 있는 배고픈 천사까지. 배고픔이 얼마나 철저하게 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며, 그 통증을 육신에 새기는지 소설은 고통스럽게 써내려간다. 레오는 5년 후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가족은 그에게 타인처럼 느껴지고, 그는 늘 배고픈 천사를 떠올리며, 때때로 수용소를 그리워한다.
파스티오르의 경험이 바탕인 만큼 수용소 생활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다. 뮐러는 “2001년부터 파스티오르와 함께 작업을 했고, 2006년 그가 죽은 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며 “1년 후에야 그와 이별하고 혼자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지만 파스티오르가 없었다면 수용소 일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공을 친구에게 돌렸다. 하지만 파스티오르의 구술이 처절한 고통의 세계로 형상화될 수 있었던 건 뮐러의 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언어 감각의 힘 때문이다. 삽, 굴뚝, 빵, 손수건 등 수용소의 물상들은 문학의 세계 안에서 은유의 힘을 빌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물상들은 생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동력의 일부가 된다.
“너는 돌아올 거야. 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중노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할머니.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82∼83쪽)
“돌아올 거야”라는 말이 그를 살렸는지, 그의 의지가 돌아오게 했는지는 뮐러의 소설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무너져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빛나는 마음의 무엇, 그리고 그 무엇이 세상으로 표출되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빚어내는 시적 언어의 생동과 조화가 뮐러의 소설에는 있다.
‘숨그네’는 억압과 공포, 불안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진중한 주제 의식과 그 무거움을 침착하고 완전하게 버텨나가는 작가의 내공,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들어지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통의 역사와 그래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내밀함을 밀도 있고 섬세한 언어로 그려내는 뮐러의 작품은 그 자신의 생에 기반을 둔다.
뮐러는 1953년 루마니아 바나트 지방에서 독일계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됐고, 어머니는 5년 간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노역했다.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로 인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란 뮐러는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숨은 말들을 찾아 나섰고, 언어에 집착했다고 한다. 1987년 독일로 망명한 그는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생생히 담은 소설 ‘인간은 이 세상의 꿩이다’ ‘그 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등을 발표했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