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인류의 희망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20장 19∼23절
입력 2010-04-02 15:32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설교 요약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 최대의 기적이요, 기쁨과 감격의 사건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과 기쁨과 소망을 주셨다.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에게 나타나 4가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첫째, 예수님은 평화를 선포하셨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예수님께서 절망, 낙심의 자리에 주저앉아 두려움 속에 문을 꼭꼭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절망 중에 처한 제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들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참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참 평화요, 영원한 평화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한 평화이다. 이 평화가 임할 때 근심, 걱정, 두려움이 물러가게 된다. 이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야 한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 대한민국에 참 평화가 임해야 한다. 저 북녘 땅에도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 모든 북한동포의 마음에도 평화가 넘쳐나야 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주여, 이 땅에 평화를 주셔서 속히 남북이 통일되게 하여 주소서.” 두려움, 염려, 근심이 있는가? 예수님의 평화를 소유하라.
둘째, 예수님은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절망에 처한 자들에게 보내셨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로 참 평안과 참 기쁨, 참 사랑의 축복을 받았으니 슬픈 세상에 나아가 많은 불쌍한 영혼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 평화 사랑을 전해야 한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야 한다.
주님께서 복음 들고 나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우리는 언제나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짧은 인생 길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 이루어 놓아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외된 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가? 외롭게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소년소녀가장들, 독거노인들, 장애로 고통당하는 장애우들, 서울역 영등포역을 비롯해 곳곳에서 집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노숙인들, 갈 곳 없어 철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시골 농촌과 산간벽지에 버려진 아이들,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외국인 이주 가정의 자녀들. 우리 모두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생태계 파괴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환경 보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최하위다. 27년 만에 서울의 초등학교 학생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20∼30년 후 노동시장이 붕괴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겸손으로 옷 입고 섬김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여기서 ‘숨을 내쉬며’라는 말씀은 인간 창조의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신 것 같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성령이 그 영혼에 들어오게 되었다. 성령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성령충만 없이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사모하는 자 누구에게나 성령충만을 주신다.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은 예수의 영, 살리는 영, 사랑의 영,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영이다. 성령충만은 곧 예수충만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넷째, 예수님은 용서를 명하셨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용서는 사랑의 결정체요, 부활 메시지의 완성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되고 기도가 응답된다. 한 마음 되는 역사도 용서를 통해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 예수 사랑을 갖고 용서를 실천하며 살 때 가정 환경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 늘 싸우는 모습만을 보여준 국회가 이제 그리스도의 용서의 정신으로 대화 화해 타협을 통해 아름다운 국회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좁은 땅덩어리에 존재하고 있는 지역 간, 계층 간, 이념 간 갈등이 용서와 화해로 치료되어야 한다.
오클라호마 인디언교회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용서에 대한 글이다.
“우리는 여섯 번 파산당하고 이사하였다. 그때마다 우리 재산은 모두 약탈당하였다. 우리는 미주리강을 건너 거기 집 짓고 살면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해 안 가 백인들이 쫓아와 재산을 빼앗았다. 우리는 다시 옮겨 좋은 농장, 편리한 집과 외양간 짓고, 자녀 위해 학교 짓고, 예배당 짓고 복음을 들었다. 그런데 백인들이 다시 쫓아와서 말과 소를 다 몰아갔다. 그들을 쫓아가는 자는 다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백인들이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복음은 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고난보다 더 큰 것을 주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찰스 저니케이크 1886년 4월.”
이것이 우리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겼지만 그리스도의 복음과 용서가 그들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용서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