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호밀밭의 젊은이들

입력 2010-04-01 18:17


“김예슬 채상원은 스스로 파수꾼이 돼라… 병장 이상민은 솟구쳐 부상하라”

계급만 나열된 천안함 실종자 가운데 나이가 알려진 두 사람이 있다. 병장 이상민(89년생)과 병장 이상민(88년생). 스물 한두 살의 꽃다운 청춘이다. 공주와 순천 출신이라는 것, 제대를 두세 달 앞두고 있었다는 것 외에 아는 바 없지만 대한민국 젊은이로서 피할 수 없는 병역의무를 수행하다 지금껏 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온 국민이 수병 46명의 안위를 걱정하던 지난 29일 밤 서울대생 채상원군은 사회과학대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다.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이 제목은 앞서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고 대자보를 붙인 고려대생 김예슬양을 패러디한 것이다.

채군은 “삶의 의미도,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학 내의 모든 구습과 싸워야 한다”고 밝혔다. 김예슬양과 엇비슷한 내용이다. 김양 역시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라고 비판한 뒤 “스무 살이 되어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고 자조했다. 채군은 대학에 남아서 싸운다고 했고, 김양은 대학이 더러워 떠났다는 차이가 있다.

글의 의도를 책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채군의 대자보가 천안함 침몰 사건의 와중에 나왔다는 시점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시시한 사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속의 어리석음이 문제다. 나아가 젊음의 고민은 경청하지 않은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까지 엿보인다.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이십대 전반전’을 보면 20대 초반의 서울대생(혹은 졸업생) 다섯 명이 등장해 오늘의 대학과 대학생활을 거침없이 말한다. 영어 강의의 공허함, 공급자 위주의 낡은 커리큘럼, 과도한 줄세우기가 대학 분위기를 질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20대가 맞닥뜨리는 불안감은 기성세대가 짐작하는 것보다 크다. 우리 대학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는 진부함을 지울 수 없다. 기껏 청춘의 덫 앞에서 허둥대는 유약한 모습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앞질러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이뤄낸 명문대 입학”이라거나,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학교에 들어가면 누릴 수 있다는 ‘자유’ ‘낭만’ 따위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경쟁에 대한 반성 내지 부담을 내비쳤다.

여기서 경쟁을 없앨 방법이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인간이나 동물의 세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다. 때론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다만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을 보장하는 룰이 중요하다. 이 게임의 룰이 잘못됐다면 바로잡는 것이 그들 뜻있는 엘리트들의 몫이다.

대학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그렇다. “가만히 있으면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강요하는 대학에 우리가 상상했던 대학생활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진리도, 정의도, 우정도 없는 대학이라고 말한다. 대학은 개인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니다. 교수가 과외교사처럼 맨투맨으로 지도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와 낭만도 그저 안겨주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스스로 배우면서 찾아내고 만들어 가야 한다. 깨지고 터지고 방황하면서 스스로 단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권한다. 워낙 알려진 고전이지만 주인공 콜필드가 세상과 부딪치며 진정한 파수꾼의 역할을 찾는 과정을 읽으면 젊음의 열병은 의외로 쉽게 치유된다. 김효정이 쓴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도 좋다. 7년 동안 사막 마라톤을 다섯 번 완주하면서 흔들리는 청춘을 부여잡은 기록이다.

그러나 어쩌나. 김예슬과 채상원과 친구 또래인 이상민 병장에게는 달릴 사막도, 둘러볼 호밀밭도 없다. 깊은 바다 어디쯤에서 자신의 대자보를 쓰고 있을까. 김덕규라는 네티즌의 글을 패러디하며 이들 젊은이와 대화하고 싶다.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거친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하라. 온 힘을 다하며 돌아오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