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김명호] 유언비어 권하는 사회
입력 2010-04-01 18:14
큰 사고나 사건, 정치적 사건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게 마련이다. 유언비어의 속성 중 가장 저질스럽고, 치사스러운 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상이다. 그럴듯한 설(說)이 생성돼 유포되다가, 사실이 아니면 슬그머니 연관성 있는 다른 유언비어로 비화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확대 증폭시키는 ‘중간 역할’들이 있다. 정치인의 주관적인 시각, 인터넷상의 ‘아니면 말고’식 주장, 설익은 보도 등이 그런 역할을 한다. 주장 당시엔 어떤 근거가 있어 그렇게 판단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미국은 우리보다 유언비어가 더 많은 사회다. 그러나 확대 재생산은 우리처럼 심하지 않다. 정치 사회 구성원들이 객관적 사실을 보다 중시하고, 절제하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출생지에 관한 유언비어는 전형적인 예다.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게 요지다. 주로 백인 극우보수층이 주장하는 것으로, 단체도 있고 인터넷 사이트까지 운영된다.
이 유언비어는 선거 때인 2008년에 전국적 논란거리였다가 하와이 주정부의 출생증명서 제시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 건강보험 개혁으로 미국 여론이 둘로 쪼개졌을 때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오바마의 케냐 출생확인서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의혹논자들이 제시한 문건은 나중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오바마의 할머니가 ‘오바마가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케냐 출생설이 수그러들 때쯤 되자 오바마가 스무살 때 인도네시아 여권을 사용해 파키스탄을 여행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가 인도네시아에 살았었기 때문에 설사 미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포기하고 인도네시아 여권을 만들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갔었다는 얘기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슬람과의 ‘친숙한 관계’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하기야 오바마가 이슬람교도라고 응답한 미국민이 13%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오바마가 1981년에 대학 친구와 파키스탄을 여행한 것은 맞지만,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이나 주류 언론이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거나 근거 없는 주장을 보태지는 않았다. 유언비어를 주장하는 이들은 보통 객관적 사실을 들이대도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 극우보수주의자로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는 오바마가 후보 때(2008년 10월)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에 하와이를 방문했던 것을 출생증명서를 위조하기 위해서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 같은 유언비어에 대한 백악관 대응은 명쾌하고 간단했다. 정치적 시각을 배제시킨, 객관적 사실에 대한 신속한 확인이었다. 미국 내 유언비어나 음모론의 대표적인 예는 ‘9·11테러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다’거나, ‘에이즈는 CIA(중앙정보국)가 동성애자나 흑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개발한 전염병’ ‘달 착륙 위조’ 등이다.
9·11테러에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만든 루스 체인지(loose change)라는 동영상을 보면 제법 그럴듯하다. 4년 전 이 동영상으로 폭약에 의한 내부폭발 등의 의혹이 미 전역에 확산됐지만, 정부는 국무부 정보오용대책팀을 통해 반론보고서를 내고, 표준기술연구원을 통해 기술적 사실만 차분히 전달해 의혹을 불식시켰다. 한국과의 차이점은 정치인들이나 일부 언론이 의혹을 부채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떠돈다.
천안함 침몰사고 원인으로 외부 폭발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원인이 확실히 밝혀질 때까지 지금보다 더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심각한 후유증과 유언비어가 나돌 것이다. 정부는 침착해야 한다. 또박또박 객관적 사실을 밝히면서, 위기대응 매뉴얼에 따라 차분히 대처해야 한다. 이념의 양쪽 끝에서 머리띠 매고 떠드는 자들에게 휘둘려선 절대 안 된다.
워싱턴=김명호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