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17·끝) 천사원의 소임 다하며 말씀대로 살아갈 것

입력 2010-04-01 17:31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몹시 심했다. 장애인들은 불구자, 폐질자 혹은 병신 등으로 비하됐고, 사회의 제반 제도에서 소외돼 있었다. 특히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는 그들을 위한 보호·양육시설이나 특수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고, 골방에 가두거나 버려졌다가 시립병원 등에 수용되는 것이 허다했다.

78년 어느 날 나는 서울시립아동병원 김기수 원장의 안내로 병원을 둘러봤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장애아들의 고아원과 다름없었다. 병원에 수용된 300여명 모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고, 그들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다른 아동들의 입원 치료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 원장이 하소연했다.

“조 원장, 도와주십시오. 장애아동은 계속 늘어나는데, 아무도 장애고아원을 운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직업보호시설을 운영할 계획을 바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하겠다고 김 원장에게 약속했다.

장애고아원 설립을 위해 모금도 하고, 조언도 받고자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모두가 반대했다. 특히 의사나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국가도 못하는 장애인 시설을 어떻게 개인이 운영하느냐”며 “장애인에게는 교육, 치료, 재활 등의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일개 사설 고아원 차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립병원에 있던 장애아들이 눈에 밟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고 기도하면서 무작정 장애아동들을 위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재원과 후원금을 모두 합쳐도 자금이 모자라 가까운 친구에게 20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80년에 건물을 준공하고 시립아동병원에서 40명의 장애아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학년당 2학급(학급당 20명)씩 개설 허가를 받아 특수학교를 시작했다.

학교만으로는 장애인들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전문적인 종합복지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선교부는 당시 현금 20만 달러와 종로 지역의 땅 617평을 기증해 줬다. 이를 통해 점차 복지관, 재활병원, 재활체육센터 등 여러 시설과 기관을 갖출 수 있었다. 현재는 하루 평균 1000명이 넘는 장애인이 천사원 내에서 교육, 치료, 재활, 직업 훈련 등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나는 천사원을 설립하신 고 윤성렬 목사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목사님은 “남을 도울 때는 작은 기부를 해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드려라. 돕는 일도 정성을 다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신다” “정직해라, 근면해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등의 말씀을 항상 하셨다. 그분은 90세가 넘어서도 신촌에서 천사원까지 늘 걸어오시면서 노끈을 주워 판 돈으로 천사원 운영자금을 보태 주셨다. 또 돌아가시기 전 자기 소유의 물건을 모두 팔아서 뉴기니 선교에 바치셨다.

나는 그를 닮으려고 파주 오산리기도원, 철원 대한수도원 등을 다니며 기도했고 요즘도 새벽기도회 때마다 천사원 기관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기도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처럼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살아가며 천사원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길 소망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