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위 ‘피겨 삼국지’ 김연아를 잡아라… 북미·유럽·일본 ‘3강 파워게임’
입력 2010-04-01 18:09
위·촉·오 패권다툼이 빙판 위에서 재연되고 있다. 종목은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전통의 강호 러시아와 미국이 주춤하는 사이, 피겨 패권은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사상 첫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며 아시아인으로 처음 우승한 이토 미도리를 앞세운 일본 손에 넘어가는 듯했다. 일본의 바람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거세게 불었다. 그때 혈혈단신 나타난 재야 영웅이 있으니, 이토 미도리의 후신으로 추앙받던 아사다 마오를 패퇴시킨 김연아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북미, 일본이 벌이는 피겨 삼국지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김연아를 앞세워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유럽의 대항마 1순위로, 일본은 동아시아 위상 강화를 위한 잠재적 파트너로 한국을 여기고 있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있는 한국을 끌어들여야 심판 배정과 피겨 룰 개정 등 주도권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캐나다의 북미권에서는 국제빙상연맹(ISU) 심판 배정에 불만이 높다. 심판진이 유럽 출신 일색이기 때문이다. ISU 회원국(63개국) 중 유럽은 36개국으로 절반이 넘는다. 심판을 추첨으로 배정하는 국제대회에서 머릿수가 많은 유럽의 심판 배정 확률은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 2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유럽 심판은 여자 쇼트프로그램 9명 중 6명, 프리스케이팅 9명 중 7명이었다. 미국 심판은 쇼트, 캐나다 심판은 프리에만 참가했다. 반면 지난달 27일 기준 여자 싱글 세계랭킹 10위 안에 든 유럽 선수는 4명에 불과하다.
지난달 18일 만난 ISU 관계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알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 주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대부분 아시아와 북미권인데도 주도권은 유럽이 쥐고 있다”고 말했다.
피겨 판정은 심판진과 테크니컬 패널이 담당한다. 대체적으로 심판은 선수 출신이, 테크니컬 패널은 코치들이 맡는다. 테크니컬 패널은 주로 ‘무엇을(What)’ 연기했는지를, 심판은 각각의 연기를 ‘어떻게(How)’ 했는지를 판단한다. 테크니컬 패널은 컨트롤러, 스페셜리스트, 어시스턴트 3명으로 이뤄진다. 연기가 끝나면 스페셜리스트가 먼저 평가를 하고 컨트롤러나 어시스턴트가 이에 동의하면 판정이 확정된다. 심판은 이를 토대로 점수를 매긴다.
“심판 혼자 판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ISU 관계자의 말이지만 피겨계 안팎에서는 국가별·대륙별로 선호하는 선수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피겨 룰을 둘러싼 줄다리기도 심하다. 일본은 피겨 채점 규정이 난이도 높은 점프를 구사하는 아사다에게 불리하게 돼 있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현재 일본은 쇼트프로그램 필수요소를 ‘더블 악셀’에서 ‘더블 악셀 또는 트리플 악셀’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룰을 바꾸면 아사다가 트리플 악셀을 뛰었을 때 기본점수 4.7점을 더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프에 실패해 더블 악셀로 다운그레이드되더라도 뒤에 뛰는 더블 악셀이 0점 처리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쇼트에서 같은 점프를 두 번 뛰면 하나를 무효 처리하기 때문이다. 현역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트리플 악셀을 뛰지만 성공률이 낮은 아사다로선 점수를 덜 까먹을 수 있다.
국제 피겨 룰은 2년마다 열리는 ISU 총회에서 결정된다. 일본 빙상연맹이 개정안을 제출하면 오는 6월 스페인 총회에서 채택 여부가 결정된다. 지난 1월 기준 ISU 공식 스폰서 9개 중 4개가 일본 기업이다. 일본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유일한 ISU 심판인 이지희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ISU도 수익을 내야 하는데 스폰서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트리플 악셀 등 고난도 점프의 기본점수를 올려줘야 한다는 얘기가 ISU 내부에서 들려온다.”(ISU 관계자)
김연아의 위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한 토막. 밴쿠버 동계올림픽 프리스케이팅이 끝난 직후 심판들은 판정 결과를 토론하는 ‘라운드테이블 미팅’에 모였다. 김연아는 역대 최고 기록인 150.06점을 받았지만 아무도 이 점수가 적절한지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아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프로그램 구성점수(PCS)가 9점짜리다” “쇼트와 프리에서 실수 없이 연기를 펼친 것은 올림픽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아사다에 대해서는 “깜찍하고 귀여운 음악은 훌륭하게 소화하지만 웅장한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평가가 나왔다.
피겨 파워게임에서 한국의 무기는 하나밖에 없다. 김연아다. 김연아는 이르면 올해 은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포스트 김연아’는 준비되고 있을까.
지난 1월 열린 제64회 피겨종합선수권대회에서 8년 전 김연아가 그랬듯 열두 살 초등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김해진(관문초)이었다. 같은 나이의 박소연(나주초)도 3위에 올랐다. ‘연아 키즈’는 분명 자라고 있다. 그러나 연아 키즈가 제2의 김연아로 자라나기에는 환경이 여전히 열악하다. 피겨 전용 빙상장은 요원하고, 전지훈련비를 팬 모금으로 마련할 만큼 재정 지원도 빈약하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대표선수를 더 늘리고, 대표-상비군-꿈나무로 이어지는 체제를 정비하고, 지원도 대폭 늘릴 예정”이라며 “점프보다는 기본기가 충실한 선수가 많아지도록 유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