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엄마’ 꿈꾸는 맹렬 피겨맘 24시
입력 2010-04-01 18:19
과천으로 목동으로 … ‘맹모빙판지교’
초등학생 딸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기대 선 딸의 오른발을 잡더니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검정색 타이즈가 ‘주∼욱’ 늘어나며 ‘1자’로 찢어진 다리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딸은 투정하지 않았다. 오른발 스트레칭을 끝낸 엄마는 왼발을 잡았다.
지난 29일 경기도 과천시 과천시민회관 아이스링크 기온은 영하 7도였다. 얼음판 바깥 복도와 계단은 체력훈련을 하는 소녀들로 북적였다. 지하 2층∼지상 2층 계단을 뛰어다니던 소녀도 초등학생이다. 계단 맨 밑에 서 있던 엄마는 헉헉거리며 뛰어온 딸에게 인자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우리 한 번만 더 하자.”
복도의 한 모녀는 점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딸(6)은 “엄마, 연아 언니처럼 해볼게” 하더니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한 바퀴 남짓 돌고는 팔을 벌리며 착지했다. 옆에 있던 다른 엄마가 이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의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엄마가 왜 웃는지 안다는 듯 펄쩍 뛰어올라 두 바퀴를 돌았다. “좀 있으면 트리플 점프도 하겠다.” 엄마 표정이 더 밝아졌다.
아이스링크 주변은 체력단련장 같았다. 엄마들이 하나씩 끌고 온 여행가방에는 스케이트부터 아령까지 운동용품이 가득하다. 어떤 딸은 엄마 앞에서 줄넘기를 하고, 다른 딸은 이너바우어(양팔을 벌리고 허리를 뒤로 깊숙이 젖히는 자세)를 반복한다. 코치들은 다칠 수 있다며 이런 훈련을 말린다는데 ‘맹렬엄마’들은 주차장에서, 복도에서, 계단에서 딸들과 함께 땀을 쏟는다.
김연아 어머니 박미희(51)씨는 2008년 저서 ‘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에 이렇게 썼다.
‘빙판에서 코치는 선생님이지만, 빙판 밖에서 몸 푸는 훈련을 시키는 건 내 담당이었다… 빙판에 들어가기 전후에 스트레칭 시키고, 빙판에서 연습할 때는 주목해서 지켜보고, 집에 와서는 윗몸일으키기와 러닝머신 등 기초체력 운동 지도까지 엄마인 내가 한다.’
피겨 국가대표 김연아와 곽민정이 훈련했던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제2의 연아 엄마’를 꿈꾸는 ‘피겨맘’들에게 이 책은 이미 ‘교과서’가 돼 있었다.
과천시민회관에서 월 7만여원에 주 3회 피겨를 배우는 어린이반은 120여명, 월 30만∼150만원 개인레슨 수강생은 150여명이다. 3년 전보다 배 이상 증가했다. 수강 대기자 명단에 매달 20여명이 이름을 올리지만 좀처럼 빈 자리가 나지 않는다.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 피겨 강습반에도 600여명이 등록돼 있다. 이 가운데 400여명은 새벽 5∼6시나 밤 10시에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개인레슨도 받는다. 과천과 목동 아이스링크 피겨 수강생의 99%는 7∼12세 여자 어린이, 김연아를 보고 꿈을 키우기 시작한 ‘연아 키즈’다.
그 엄마들에게 얼음판은 전쟁터에 가깝다. 오후 2시, 과천 아이스링크는 개인레슨이 한창이었다. 여자 어린이 10여명이 3∼4개 그룹으로 나뉘어 훈련하는 모습을 엄마 10여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링크 주변 복도에는 돌이 갓 지난 아기를 벤치에 눕혀 재우며 딸의 레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엄마도 있다. 그의 여행가방에는 스케이트와 함께 기저귀 등 육아용품도 들었다.
“우리 애가 예뻐요. 선도 곱고요.” 엄마들의 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케이트를 잘 탄다거나, 소질이 있다는 말 대신 “예쁘다”고 한다. 한 코치는 “김연아 선수가 팔다리가 길고 얼굴도 예쁘다보니 엄마들이 자질보다 외모를 우선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1시간 뒤 초급반 강습을 앞두고 얼음을 정리하기 위해 정빙기가 들어섰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자 엄마들도 분주해졌다. 스케이트를 벗기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언 발을 녹여주기 위해서다. 종아리와 무릎을 마사지하는 엄마도, 복도에서 뜀박질을 시키는 엄마도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싸온 샌드위치나 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과천시민회관 관계자는 “무턱대고 ‘김연아처럼 만들어달라’거나 처음부터 ‘선수 시키고 싶다’며 찾아오는 엄마들이 많다. 취미로 배우던 예전에는 거의 없던 일”이라고 했다.
유치원 때 취미로 피겨를 시작했던 강희정(가명·10·초등4년)의 하루는 숨 가쁘다. 오전 8시에 일어나 학교에 간다. 수업이 끝나면 오후 2시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개인 레슨을 받는다. 오후 3시 집으로 가 잠시 자고 오후 8시부터 다시 링크에 나와 체력훈련을 받는다. 2시간 지상훈련이 끝나면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스케이트를 탄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1시다.
경기도 하남시에 살던 희정이네는 올 초 과천으로 이사했다. 과천 아이스링크는 아이스하키 훈련이 적어 다른 곳보다 빙질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감한 이사 덕에 희정이 엄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 중학생 아들의 저녁을 챙겨줄 수 있다.
“경기도 광주나 분당에서 과천으로 출퇴근하는 엄마들도 있어요. 애가 하나면 괜찮은데 여럿이면 다른 애들은 포기하는 거죠. 나도 집에서 아이스링크까지 걸어서 5분 거리니까 아들 밥 해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엄두도 못내요.”
희정이 엄마는 말을 이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정이 스케이트 실력을 묻자 엄마 표정이 밝아졌다. “아까 더블-더블 점프 뛰던 거 보셨어요? 애가 너무 좋아하고 잘해서, 본격적으로 선수를 시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개인레슨은 정식 선수만 받는 게 아니었다. 취미로 배우는 경우에도 강습반 자리가 없거나, 고급 훈련을 받고 싶으면 개인레슨을 택한다. 희정이도 취미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해서 개인레슨을 받으며 진로를 고민하는 지점에 와 있었다.
-학교 공부는 어떤가요.
“아무래도 힘들어해요. 그래서 홍삼이나 포도즙 같은 거,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여요. 공부도 해야 하는데, 영어는 과외를 하지만….”
-선수로 키울 건가요.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요.
“애가 좋아하니까 시키긴 하는데… 고민이 많아요. 훈련할 때도 유심히 지켜보게 되고 코치님께도 자주 여쭤보는데 확신은 안 서더라고요. 여기 있는 엄마들 다 저랑 비슷할 거예요.”
대한빙상경기연맹은 태권도처럼 승급심사를 거쳐 피겨선수를 1∼8급으로 나눠 관리한다. 여자는 트리플 점프 세 가지(남자는 네 가지)와 트리플 점프를 포함한 연결 점프 하나를 성공시켜야 최고 등급인 8급을 받는다. 현재 김연아와 곽민정, 김해진 등 7∼8급 선수는 모두 10여명이다.
이날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훈련한 김혜연(가명·12)은 한때 유망주로 꼽혔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더블 점프는 쉽게 성공했는데 트리플 점프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혜연이 엄마는 “1년만 더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왜 1년인가요.
“안될 경우 공부도 시켜야 하니까요. 중학교 입학 전까진 결정하려고요. 가끔 김연아 엄마 생각하면 혜연이한테 미안해요.”
-김연아 엄마요?
“연아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다면서요. 혹독할 정도로. 그런데 저는 피겨를 그만큼 몰라요. 한 번 엄하게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딸이 힘들어하는 것도 보기 힘들고….”
-뒷바라지가 많이 힘든가요.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매일 밤늦게 다녀야 하고, 음식도 골라서 해줘야 하고, 병원도 꼬박꼬박 다니며 검진 받아야 하고. 취미로 시작한 피겨를 어찌어찌 하다보니 5년간 했는데, 혹시 한계에 다다른 것 아닌가 불안한데,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네요.”
2008년 김연아가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등장한 연아 키즈와 피겨맘 1세대. 그 중 상당수가 스케이트를 계속 타야 하는지, 갈림길에 선 아이스링크는 꿈과 불안이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과천=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