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휴스턴의 노부부
입력 2010-04-01 18:34
공항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구글 어스의 정확도에 다시금 놀랐다. 미국 휴스턴에 오기 전 예습 삼아 구글 어스를 들여다봤을 때 느꼈던 그대로다. 텍사스 사막 위에 세워진 나른한 도시.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수십 층짜리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음에도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차도 사람도 길거리에서 만날 수가 없다. 여름이 길고 더운 탓에 사람들은 냉방이 잘 되는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건물 밖에서는 무조건 차로 이동한다. 늦은 밤, 고층 건물마다 불이 환한데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노숙인뿐이다. 유령도시 같다.
내로라하는 사진 축제인 ‘포토페스트(FotoFest)’는 이토록 재미없는 도시에서 열린다. 정확하게 파악하기조차 어렵지만 지구상에서 하루에 한 번꼴로 사진페스티벌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중에서 주목받은 행사는 20개 안팎, 그 안에서도 포토페스트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도시를 닮은 탓인지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지금껏 다녀본 여느 행사보다 겉치장을 안 했다. 행사장 주변에 매달아 놓은 가로등 배너와 이정표만 아니라면 행사가 이뤄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포토페스트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트폴리오 리뷰’가 열린다. 포트폴리오 리뷰란 사진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기획자, 큐레이터, 편집자 등의 리뷰어에게 보여주고 평을 듣거나 홍보의 기회로 삼는 자리.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 주는 리뷰어를 만나면 전시로 이어지거나 매체에 소개될 수 있다. 리뷰어로부터 작업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결정적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참가비가 820달러. 4일 동안 자신이 만나고 싶은 리뷰어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대가다. 최소 16명의 리뷰어를 만날 수 있고, 한 번 리뷰 받는 데 20분이 주어진다.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카트 가득 사진을 싣고 와서 30대 초반 큐레이터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도 흔하다. 올해 포토페스트에 참가한 리뷰어는 170명, 작가는 520여명. 세계 각지에 흩어진 전문가 700명을 자발적으로 모이게 하는 일은 관객을 7만명 모으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다.
휴스턴 포토페스트는 프레드릭 볼드윈과 웬디 와트리스 부부가 1983년 처음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축제인 프랑스의 아를르포토페스티벌에 참석했다가 그곳의 포트폴리오 리뷰에서 착안한 것이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프레드릭의 나이는 81세, 웬디는 64세가 됐다. 그들 덕분에, 나른한 도시는 미국 사진의 중요한 거점이 됐고, 사진 문화는 풍요로워졌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두 부부를 만났을 때, 프레드릭은 이렇게 말했다.
“화려한 행사는 내용이 없다. 우리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를 리뷰어로 부르지 않는다. 시장이 나와 축사하는 전시를 기획하지도 않는다. 작가 작업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스스로 리뷰어가 돼 행사장을 누비면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의 작품에 감동하는 노부부를 보고 있노라면 휴스턴의 나른함이 색다른 맛으로 다가온다.
<포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