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14)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대충 만들어 파는 건 도둑질”… 꼿꼿한 선비경영
입력 2010-03-31 20:39
1906∼1984
1968년 4월 20일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조 회장이 효성의 주력업종으로 낙점한 ‘동양나이론’ 울산 공장의 시운전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장남 조석래(현 효성그룹 회장) 상무를 불렀다. “시운전에 나는 입회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무슨 결함이라도 있게 되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 결함이 마치 자기 책임인 것처럼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가면 그 사람들이 더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말을 다 들은 장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운전 당일 울산 현장에서 서울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는 성공을 알리는 감격에 들뜬 목소리였다. 동앙나이론은 시운전에 성공한 다음날부터 정상 조업에 들어갔고 생산 제품은 창고에 들어가기 전에 팔려나갔다. 이후 동양나이론은 현재 생산규모 세계 4위, 타이어코드(섬유재질의 타이어 보강재) 세계 1위 업체로 거듭났고 지난해 매출 10조원을 돌파한 효성그룹 성장의 뼈대 역할을 해왔다.
◇남들 은퇴하는 56세에 효성 창업=만우(晩愚) 조홍제 회장은 1906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강직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은 조 회장은 신학문 수학을 반대하는 조부의 뜻에 따라 7세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신학문에 대한 갈증이 컸던 조 회장은 상투를 잘라 자신의 의지를 조부에게 나타냈고 17세가 돼서야 보통학교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후 법정대학 독일경제학과를 나이 서른에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귀향한 조 회장은 고향 함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11월에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는 삼성물산공사에 1000만원을 투자한 것이 인연이 돼 이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과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함께 설립한 후 1960년에는 제일제당 사장에까지 취임했지만 1962년 9월 돌연 이 회장과 동업 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이 전 회장과 동업 관계를 청산한 해에 조 회장은 임직원 15명과 효성물산을 세우고 제분업을 시작한다. 당시 조 회장의 나이는 다른 이들이 현역에서 물러날 시기인 56세였다. 조 회장이 자신의 호를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의 만우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조 회장은 누적된 사채로 휴업 상태이던 조선제분을 인수해 같은 해 10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조선제분은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힘입어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1963년 5월에는 대출금을 모두 갚고 부실기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후 조 회장은 9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한국타이어 경영에도 참여하며 해외 판로 개척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66년 국산자동차 양산과 맞물리며 타이어 수요가 늘었고 수출량도 급증했다. 마침내 1967년 3월 조 회장이 10년 정도 고생할 각오로 시작했던 한국타이어가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며 은행의 법정관리를 벗어났다.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있던 대전피혁도 1963년 인수한 후 1967년 수출액 50만5000달러의 흑자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등 새로 시작하는 사업마다 성공가도를 달렸다. 주력 신규업종인 동양나이론까지 성공하면서 효성그룹은 1970년 중반 국내 5대 기업으로 부상하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조 회장이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업을 새로 시작하기 전부터 철저한 사전 준비를 갖추는 등의 경영 합리화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모든 비용과 그 효과 등을 수치로 엄정하게 나타내지 않으면 안됐다. 한국타이어가 일본 요코하마 타이어와 기술제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조 회장의 이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1년 동안 기술제휴로 인해 지급하는 기술료와 기술 수용으로 얻는 이익을 금액으로 계산, 비교해 앞으로 10년 동안 수지계산서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임직원들은 1년 동안의 수지계산서도 수치화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1년여의 시간을 들인 끝에 모든 가정을 전제로 한 수지계산서를 제출했고 그때서야 조 회장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조 회장 스스로가 계산에 뛰어나 직원들을 자주 당황하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그는 특이하게도 성냥개비를 주판 다루듯이 능숙하게 사용해 계산을 하는 ‘성냥개비 계산법’을 사용했다.
조 회장은 생전에 “40여 년간 기업을 경영하면서 내가 주관했던 모든 사업에서 실패가 없었던 것은 그 사업성을 검토하는 데 있어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계수(係數)적으로 철저하게 체크해 이만하면 틀림없겠다는 심증이 서면 비로소 착수하고 대신 추진은 담당자나 전문가에게 일임해온 데 있지 않았나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 파는 것은 ‘도둑질’=효성그룹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 건물이 하나 있다. 국내 민간 기업 최초로 설립된 중앙연구소가 그곳이다. 1971년 1월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에서 이름이 바뀐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 화학 섬유업계 발전의 요람으로 꼽힌다.
조 회장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빠른 경제 성장 배경이 기술이라는 것을 직접 보고 깨달은 후 연구소 설립을 계획했다. 조 회장은 1960년대 물자 부족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물건이 팔리는 것을 두고 ‘도둑질’과 같은 것이라 여길 정도로 품질에 집착했다.
기술에 대한 고집은 이공계를 우대하는 효성그룹의 사풍을 만들었다. 송인상 전 동양나이론 회장이 효성에 처음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사내 최고위직에 화공과, 섬유공학과, 기계과 등의 이공계출신들이 즐비하다는 점이었을 정도로 효성에는 이공계 출신들이 우대를 받았다. 실제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기술진의 판단이 존중 받았다.
조 회장의 기술에 대한 애정은 1976년부터 맡았던 동양학원의 ‘적재천만 불여박기재신(積財千萬 不如薄技在身)’ 이라는 교시(校是)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동양학원은 조 회장이 지병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1983년 생전 마지막 나들이를 동양공전 졸업식 참석으로 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곳이다.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도 더 귀하다’는 뜻의 교시는 품질을 앞에 두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선비적인 꼿꼿함이 묻어나는 말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