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미션-땅] 외국인 선교사 묻힌 서울 양화진묘원을 찾아서

입력 2010-03-31 21:00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면적 1만3224㎡의 이 동산에는 413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중 143기가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안장된 곳이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살짝 핀 3월 마지막 날에 양화진을 찾았다. 꽤 많은 참배객들이 있었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온 목회자 부부, 백발 성성한 노인, 수업의 일환으로 방문한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양화진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와 젊음이 약동하는 청년들, 그리고 인생의 남은 날이 그다지 많지 않은 노년이 어울려 있었다. 이들 모두는 묘비에 적힌 묘비명을 찬찬히 읽고 있었다. 목사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선교사의 묘비명을 읽어주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무덤 가운데 상당수는 이 땅에 오자마자 세상을 떠난 영아와 유아들의 것이었다.

묘비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아마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이들은 100여 년 전 어떻게 조선 땅에 올 수 있었을까. 그 결심을 할 수 있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양화진은 삶과 죽음, 인생, 사명, 그리고 땅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다. 고 한경직 목사는 생전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한번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양화진이다. 한 목사는 그 땅을 밟아보라고 당부했다.

이 묘지공원은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며 고종의 시의였던 존 헤론이 양화진에 묻히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는 부활 주일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비롯해 헤이그에 가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헐버트, 평양의 의료선교사 홀, 양반과 천민의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한 무어 등 조선을 개화시키는 데 헌신한 분들이 묻혀 있다.

이들에게 당시 조선은 ‘땅 끝’이었다. 이들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지시한 ‘그 땅’을 찾아 갔다. 조선이었다. 사명에 불탄 가슴으로 이 땅의 흙을 밟은 그들은 세월이 흘러 지금 흙으로 남아 있다. 그 땅을 우리가 밟는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된 그들 덕분에 우리가 오늘 풍성한 복음을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떠났지만 고귀한 정신은 남았다. 양화진은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배객들에게 알려준다. 짧은 한 줄의 묘비명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생과 성공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양화진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감동을 받는 묘비명이 있다. 미국 의료 선교사 켄드릭의 묘비에 적혀 있는 문구. “나에게 천 번의 생명이 있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간호사인 켄드릭은 1908년 숨을 거뒀다. 26세. 조선에 온 지 8개월 만이었다. 그녀의 선교 열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그녀는 소천 전 자신을 파송한 선교부에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의 엡윗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 저녁으로 조선에 오라고 전해 주세요”라고 편지했다. 그녀는 ‘허망하게’ 죽지 않았다. 소천 이후 엡윗청년회에서 20여명이 선교에 헌신했고 몇 명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헤론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1885년 조선을 찾아 의료 선교와 성경 번역에 헌신한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양화진 묘원 초입에 보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헐버트 선교사의 묘지가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던 묘비명이 거기 써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조선을 사랑했기에 그는 고종의 밀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유명한 언더우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아펜젤러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최근 영화 ‘창끝’의 실제 모델인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가 방한 기간 중에 양화진을 방문했다. 방명록을 보니 그의 글이 남겨 있었다. “내 아버지도 남아메리카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아들인 그 역시 양화진을 밟고 사명을 새롭게 했다.

100여 년 전 벽안의 선교사들은 조선을 ‘땅 끝’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죽었다. 그때부터 100년 후, 2만여 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땅 끝’을 향해 나갔다. 일부는 그곳에 묻힐 것이다. 오직 주님을 위해 양화진에 묻힌 자나, 이 지구상 어느 곳에 묻힌 자나 천국에서 감격의 해후를 할 것이다.

소설가 정연희씨는 이렇게 썼다. ‘양화진/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백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안에서 잠든 곳.’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