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달 창립 110주년 맞는 종교교회

입력 2010-03-29 19:30


암울한 시대 밝힌 등불 선교 중심지로 희망 전파

1900년, 경복궁 옆 자골(잣골)에 교회가 세워졌다. 한 한국인의 간절한 선교 요청에 미국 남감리교가 응답한 결과물이었다. 교회는 이후 종침교(琮琛橋) 근처로 이사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파란만장했던 20세기 민족사를 그 한자리에 서서 버텨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민족의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며, 21세기의 서울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다음달 창립 110주년을 맞는 종교교회 얘기다. 29일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서 22대 담임인 최이우 목사를 만나 교회의 역사와 신앙적 의미, 비전 등을 들었다.

◇민족사 속 종교교회=“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맡깁니다. 이 돈이 한국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는 기금의 모갯돈이 되기를 바랍니다.”

좌옹 윤치호가 1893년 봄 미 에모리대 캔들러 학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는 상하이 망명 시절 세례를 받은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었다. 남감리교는 윤치호의 거듭된 제안에 C F 리드 선교사를 보내 선교부를 설립했다. 이후 조세핀 캠벨 부인이 입국해 1898년 자골에 배화학당을 세웠고, 2년 뒤 4월 15일 부활주일에 학당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종교교회의 시작이었다.

종교교회는 남감리교의 모교회(母敎會)라 불린다. 이 교회보다 먼저 세워진 몇몇 교회들도 있지만, 일제 36년간 남감리교 선교의 구심점으로 어머니 교회 역할을 담당한 곳은 종교교회였다. 종교교회는 또 1930년 남·북 감리회의 통합을 주도하고 기독교조선감리회 초대 총리사를 맡은 양주삼 목사,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 등을 배출했다.

해방 후에는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착실하게 성장하며 한국교회의 발전을 상징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1970∼80년대 주변의 많은 교회들이 강남이나 서울 외곽으로 옮겨 교세 성장을 꾀할 때도 종교교회는 처음의 자리를 고수했다.

◇축복, 감사 그리고 비전=종교교회의 110주년은 100주년 기념을 10년 미룬 것이라 더욱 각별하다. 100주년을 맞았던 2000년에는 새 성전이 건축되던 때라 의미 있는 행사를 할 수 없었다.

최 목사는 110주년 기념행사가 축복(110년의 역사), 감사(현재), 비전(미래)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족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관통해 오면서도 종교교회가 소멸되지 않고 ‘교회’로서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진정 축복이지요. 하나님께 이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향후 100년을 위해 힘찬 도약을 다짐하려 합니다.”

종교교회는 다음달 15일 창립 기념일에 110주년 기념 개척교회 설립 추진을 선포하고, 17일에는 웨슬리 연합 찬양대와 웨슬리 심포니 오케스트라 200여명의 축하 음악회, 18일에는 초대 담임인 하디 목사 후손 등과 함께하는 기념예배를 드린다. 또 시각장애인 110명에 대한 개안수술비 지원, 110주년 기념 조형물 설치, 역사자료 전시회, 타임캡슐 제작, 기념우표·엽서 제작 등을 완료했거나 추진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은 ‘중심이 되는 교회’ ‘다리가 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라는 4대 비전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

최 목사는 2003년 3월 부임할 때부터 “교회를 바꾸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오랜 세월 축적된 목회 전통과 원로 목사, 장로들이 쌓은 리더십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다. 다만 그는 필요한 부분은 더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며 ‘플러스 방식의 변모’를 추구했다. 예를 들어 예배의 경우 순서는 전통적 방법을 유지하되 그 속에 성령의 임재와 현재적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출석 성도 수는 800여명에서 1700여명으로 늘었고, 청년부는 20여명에서 300여명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최 목사는 향후 중점 사역으로 ‘인재 양성’을 꼽았다. “종교교회는 초창기부터 교육선교의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교회의 사명 중 하나가 주님의 일꾼을 키우는 것이지요. 글로벌 리더 양성을 위해 현재 매년 2억원 정도인 교회 장학금을 10억원 수준으로 늘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