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총액계약제가 해답인가

입력 2010-03-29 17:49


얼마 전 아내가 서울 방배동 D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뜻밖의 항문 출혈 증상 때문에 방문했다가 가벼운 치핵 진단을 받았지만, 내친 김에 그동안 미뤄 온 대장검사까지 받기로 한 것이다.

검사 결과 지름 1㎝로 제법 큰 대장용종 한 개가 있고 표면이 거칠어 수상쩍다는 진단. 아내는 바로 대장내시경 용종 절제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 수술 후 지혈이 안 돼 고생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하루쯤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의사가 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왜 입원해야 했는지 의아했다. 당일 포도당 주사를 놔주고, 이튿날 오전 회진 차 병실에 들른 의사가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아 더욱 그랬다. 하다못해 배를 만져보는 촉진조차 없었다. 다만 “괜찮죠?”하고 물어보고 “퇴원하세요”라고 지시한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순간 나는 10만여원의 2인실 입원료가 아깝게 여겨졌다.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에 따른 정상적 진료 관행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과잉진료’란 생각이 고개를 든 까닭이다. “쩝! 그냥 귀가시키고 밤새 문제가 생길 경우 전화를 하라거나 응급실을 통해 재방문하라고 할 일이지….”

국민 건강보험 재정이 흔들리고 있다. 보험재정의 위기가 모두 불필요한 진료 및 낭비 때문에 초래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험자가 막대한 운영비를 쓰며 효율적으로 관리를 못한 탓, 의료 공급자인 의료기관과 소비자인 국민이 보험 진료를 남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올해 누적 적자 규모는 무려 1조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도 31조1817억원의 보험료 수입을 거뒀으나 31조1849억원을 보험자 부담 진료비와 관리운영비 등으로 지출, 당기 32억원의 적자를 봤다.

큰일이다. 이 정도 되면 당장 수술하지 않을 경우 곧 죽을 ‘중환자’에 해당된다. 그 피해는 당장 의료기관과 환자들에게 미치고 있다. 의료기관은 환자를 진료하고도 보험자 부담 진료비를 제때 돌려받지 못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환자들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해 불만이다.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건보공단은 이를 위해 의료행위 건수와 양을 제한하지 않는 현행 행위별수가제의 진료비 지불 보상 방식을 ‘총액계약제’로 전환하자는 카드를 꺼냈다. 총액계약제란 의료기관이 보험자와 미리 합의한 연간 보험진료 추정 금액 한도 안에서 의료행위를 허용하는 제도다.

건보공단 측은 이 제도가 도입되면 한 의사가 소위 과잉진료를 할 경우 한정된 진료비 총액 중에서 다른 의사가 가져갈 몫이 상대적으로 줄게 돼 진료의 적정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의료계의 예상은 이와 다르다. 받는 돈이 한정돼 있다 보니 의료기관은 당연히 원가를 최대한 절감하려 애쓰게 되고, 이는 결국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한다. 의료기관 간의 과당경쟁에 의한 도산 등 후유증도 우려된다. 따라서 의료계는 총액계약제가 성공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선 원가에도 못 미치는 보험진료 수가를 현실화하는 조처가 먼저 취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약 5.3% 수준의 보험료율 인상도 불가피하다. 우리나라와 같은 행위별수가제를 쓰다 1998년 총액계약제로 전환한 대만의 경우 보험료율은 약 8%로 우리나라보다 2.7% 포인트나 높다. 이 때문에 대만의 의료보장률은 85% 이상, 우리나라는 65% 이하에 그치고 있다.

건강보험 제도는 보험자와 의료기관, 피보험자(국민) 3자의 행태가 조화를 이룰 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건보공단은 무엇보다 의료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총액계약제를 추진하기에 앞서 효율적인 관리를 통해 운영비 지출을 최소화하는 노력부터 먼저 보여줘야 한다. 아울러 의료기관과 국민도 양질의 의료 서비스와 적정 진료를 통해 의료비 낭비를 절감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기수 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