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50)

입력 2010-03-29 09:55

나는 그렇게 믿는다.



며느리 미씨깨/며느리 배꼽/여우 오줌/쥐오줌풀/코딱지 나물/개불알꽃/홀아비 조오~~~w/도둑놈의 갈쿠리/도둑놈의 지팡이/방귀 뽕뽕 뽕나무/방귀 쌀쌀 싸리나무/밑구녕의 쑥나무/칼로 베어 피나무/목에 걸려 가시나무/덜덜 떠는 사시나무/말라빠진 살대나무/깔고 앉아 구기자나무/입 맞췄다 쪽나무....따위다.

으스름한 저녁이 되면 개울가 둑에 무리지어 피어나는 꽃이 있다. 달빛처럼 노랗기도 하고 때론 창백하기도 한 꽃이다. 그 많은 [낮]을 두고 어째서 밤에만 피는 것일까?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이 꽃에 애틋한 로맨스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달을 사랑하는 님프(요정)의 넋이라고 말이다. 달을 너무 사랑한 까닭에 별을 시기하게 되고 끝내는 그 때문에 제우스 신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되고 달님은 그 님프를 불쌍히 여겨 그를 찾아다녔다. 제우스 신이 그걸 알고 구름과 비를 보내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는 거다. 연연한 그리움을 안고 나날이 야위어 가던 님프는 드디어 숨을 거두어 언덕에 묻혔는데 거기서 풀 하나가 생겨나 어두운 밤에 홀로 달을 기다리는 외로운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맞이 꽃]이다. 그러나 그 꽃의 우리 이름은 [도둑놈 꽃]이다. 한문으로는 월견초(月見草)다. 서양 사람들은 [달을 사랑하는 님프의 넋]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우린 하필이면 [도둑놈 꽃]이라니.

저 가냘픈 풀에게 어째서 [도둑놈]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던가? 사물을 보는 따뜻한 눈망울은 어디 두고 도리어 살벌하고 경계에 찬 눈초리로 보았는가? 아름답게 생긴 꽃에 그래도 멋있는 이름을 단다는 게 [기생풀] 정도다. 아름답대서 겨우 붙인 꽃 이름이 기생풀이다.

생활의 여유가 없던 이 백성들은 밤에 피는 그 꽃의 자태에서 달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쓰라린 현실의 일면으로 보았던 게 확실하다. 다른 꽃들은 모두 어둠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피어 있으니 수상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아름다운 초목의 이름과 전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의 억눌림 속에 살았다는 증거다. 쫓기고 굶주리는 학정(虐政) 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창조할 여유가 없었던 거다. 자고 먹는 일이 바빠서 신화가 생겨날 여유가 없었을 거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고 먹는 일에 치이지도 않는데 그 흔한 초목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먹고 살기에 바빴던 조상들이 붙인 살벌한 이름 대신 이쁜 이름을 지어주고 신화를 창조하는 일을 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인간이 언제 아름다워질까? 교회가 많이 세워지면 될까? 성경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나? 아니다. 현존하는 존재로 맞닥뜨리며 사는 그것들, 풀이며 꽃과 나무의 이름에 흙의 마음과 사람의 애정 어린 눈이 머물러 이쁜 이름으로 불려질 때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