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장군의 발톱’ 작가 박조열 “평화롭게 산다는 것, 귀중함 알았으면…”

입력 2010-03-28 17:34


“쑥쓰럽지만 사랑이 아닐까요?”

1988년 연극 ‘오장군의 발톱’이 초연된 날 공연을 본 한 기자는 이 작품의 작가인 박조열(70)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작가는 순간 목이 메었다. 지난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인 박 작가는 한국전쟁 당시 혼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육군에 편입돼 가족이 있는 북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얘기를 듣는 순간 이 작품을 쓰게 된 잠재적 원천이 사랑이었단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 고향에 대한 사랑.” 최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만난 박 작가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오장군의 발톱’은 순박한 한 청년이 전쟁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담는다. 외딴 시골에서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오장군에게 어느 날 군대징집영장이 날아온다. 키우던 소 먹쇠와 교감하고, 평소 좋아하던 동네처녀 꽃분이가 결혼하자는 말에 덜컥 응할 정도로 순수한 장군은 징집이 뭔지도 모르고 이에 응한다. 전장에 배치된 장군은 군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의 순수함은 전쟁에서 비웃음거리나 거추장스러운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아들을 만나는 꿈을 꾸던 어머니에게 또 다시 장군의 징집영장이 온다. 이전 영장은 동명이인의 것이 잘못 전달된 것이었다. 뒤늦게 일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그 사이 장군은 전방에 배치된다.

장군이 소속된 ‘동쪽나라’의 사령관은 장군의 순수함을 이용해 그를 스파이로 ‘서쪽나라’에 보낼 계획을 꾸민다. 자신도 모르게 스파이가 된 장군은 어머니, 꽃분이, 먹쇠를 애타게 부르며 전쟁에 희생된다.

‘오장군의 발톱’은 분단 현실을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담아낸 작품이다. 박 작가는 1974년 이 작품을 썼지만 75년 공연금지 명령을 받는다. “공포분위기가 있을 때니까. 으레 권력에 아부하는 너덜한 자들이 있게 마련이잖습니까.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작품이 아니에요. 전쟁과 평화의 문제입니다.” ‘오장군의 발톱’은 14년이 지난 88년에야 극단 미추에 의해 처음 무대에 올려진다.

전쟁의 비극을 그리지만 ‘오장군의 발톱’은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하다. 먹쇠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장군과 감정을 나눈다. 장군을 비롯한 등장인물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게 밝은 분위기를 지닌다. 박 작가는 “전쟁을 리얼하게 그리면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동화적인 방법이 효과적이겠단 생각을 했다. 검열을 피하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잠재적으로는 작용했을 거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장군의 발톱’을 통해 “평화롭게 산다는 것, 평화의 귀중함을 알게 됐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박 작가는 86년 이후 희곡 작업을 중단했다. 쓰고 싶은 게 없어서는 아니다. 북에 남아있던 가족은 비참한 삶을 살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여동생만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남과 북의 분단상황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는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박 작가는 “슬픔에 먹혀버려서 더 이상 글을 못 쓴다”고 털어놨다. “글쓰는 게 정신노동이지만 육체노동이기도 합니다. 몸이 튼튼해야 해요. 온몸으로 글을 쓰니까요. 하나 더 쓰고 죽으면 좋을텐데…” 그의 말에서 안타까움과 미안함마저 느껴졌다.

‘오장군의 발톱’은 4월 9일부터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1644-2003).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