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 누르고 방치하다간 심장병·고혈압으로 폭발… 火, 花로 푸세요

입력 2010-03-28 17:37


직장인 이모(47)씨는 최근 가슴이 답답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또 위로 열이 치밀어 오르면서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고는 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조퇴도 여러 번 했다. 2개월 전 정기 인사에서 후배가 먼저 승진하는 것을 지켜본 다음부터 생겨난 증상이다. 이씨는 “20년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인정받아 동기보다 빨리 승진한 편이어서 이번에도 당연히 될 것으로 믿었는데…, 회사에 대한 배신감, 억울함과 함께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좌절감이 컸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화병(火病)’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한국인의 병’ 화병 다스리기

50대 이상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화병이 최근 연령에 상관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30∼40대 남성이 화병을 앓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화병·스트레스클리닉이 2007∼2008년 병원을 찾은 화병 환자(670명)를 조사한 결과, 남성 환자(155명)는 2007년 14.4%에서 2008년 27.9%로 1년새 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클리닉 방문 이유는 남자의 경우 본인 성격(40%)이 가장 많았고 대인 관계(25.2%), 직장 업무(25.2%), 배우자 성격(3.9%) 등의 순이었다. 사회 생활에서 다른 남성들과 부딪히며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병·스트레스클리닉 김종우(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남성은 승진과 인사에서 좌천됐다고 느낄 때, 퇴직 후 자신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될 때 화병이 자주 발생한다”고 말했다. 반면 여성들은 배우자 성격(36.7%), 자녀 문제(22.3%), 본인 성격(19.8%)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여성의 경우 과거에는 시댁과의 갈등이 많았지만 요즘은 대상이 시어머니에서 남편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화병은 ‘울화병’의 준말이다. 답답해 일어나는 심화(心火)로 불안증, 우울증, 신체 증상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강한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속상함, 억울함, 분함, 증오 등 감정을 가슴에 쌓아 생긴다. 1996년 미국정신의학회는 화병을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질병 목록에 등재했으며 ‘Hwabyung’이라는 한국 병명 그대로 표기했다.

화병은 우울증과는 다르다. 화병 환자는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끼지만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는 그렇지 않다. 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는 우울증과 달리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어 한다. 김 교수는 “또 화병이 있는 사람은 감정 억압을 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신체 증상을 주로 호소한다”면서 “뚜렷한 원인도 모른 채 소화불량, 두통, 흉통 등 증상으로 내과나 가정의학과를 다닌다면 한번쯤 화병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화병은 특히 책임감이 강하고 양심적이며 감정을 잘 억제하는 내성적인 사람이 잘 걸린다. 화를 쌓아두거나 쉽게 화가 나는 사람도 위험군이다. 또 동일한 스트레스와 억울함, 분노 등이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가슴에 열이 나면서 뭔가 뭉친 듯한 느낌이 2주 이상 지속되면 화병을 의심하고 전문 클리닉을 찾아 상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화병은 몸에 나타나는 열감을 측정하는 ‘적외선 체열진단검사(DITI)’, 환자의 긴장도를 재는 ‘뇌파검사’, 가슴 정중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측정하는 ’통각계 검사‘ 등을 통해 대부분 진단된다.

김 교수는 “화병을 장기간 방치하면 뇌나 심장혈관 질환 같은 심각한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화가 날 때는 폭발하지 않고 여유를 갖는 것이 좋지만 계속 참는 것은 해가 된다”면서 “운동, 화초가꾸기, 산책, 음악듣기, 명상, 노래 부르기, 글쓰기 등을 통해 화로 쌓인 에너지를 외부로 발산하는 것이 도움된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다음달 4일 ‘정신 건강의 날’을 맞아 4월 한달간 전국 14개 학회 지부에서 우울증, 스트레스성 질환 등을 주제로 건강 강좌를 무료로 개최한다. 장소 및 일정은 신경정신의학회 및 대한정신건강재단 홈페이지(www.knpa.or.kr/mind44.com)를 참조하면 된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