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미술] 서양화법의 수용과 발전

입력 2010-03-28 17:27


18세기 한국미술사에 나타난 기독교미술은 서양미술로부터 유래됐다. 소현세자와 학자들이 전한 서양문물은 당대의 화단에도 영향을 줬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미술품들이 서양화법을 전한 것이다.

이 서양화법은 국내에서 맹목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전통미술인 동양화와 접목됐다. 당시 실학이 내세운 실증적 사고가 사회적, 사상적인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후기의 회화관은 자연스럽게 변화된다. ‘서양문물의 도입’과 ‘실증적 사고’가 당시 기독교미술 형성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서양미술의 간접 접촉은 서양인 화가인 휴버트 보스와 레미옹의 방문으로 직접 접촉 단계로 발전한다. 특히 보스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달여간의 그의 짧은 체류는 네덜란드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후 한국 현대미술은 일본으로부터 직접 서양미술 수업을 받는 단계로 간다. 한국 화단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동경미술학교는 예술의 형식은 중시했지만 예술의 정신(기독교 정신)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다. 더구나 이 학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침을 순응하도록 가르쳤다.

이에 따라 이곳에서 서양미술을 배운 화가들은 한국기독교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일반적으로 이들이 그린 당시 ‘서양화’가 기독교적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오히려 한국기독교 미술은 동양화에서 꽃을 피운다. 독학으로 공부한 박수근은 동양화를 통해 새로운 기독교미술을 보여줬다. 신앙이 바탕이 된 그의 작품 세계는 민족적인 미의 자율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몇몇 대표적인 동양화가들도 이당 김은호를 통해 사실적 동양화를 개척하면서 자신들만의 기독교적 시각으로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했다. 이때 기독교미술을 형성한 동양화가들에게 신앙심은 작품 활동의 중요한 동기였다.

오늘날은 시각과 이미지의 시대이다. 시각 선교의 차원에서 기독교 미술은 소리 없는 설교이며, 간증이고 계시다. 기독교 미술은 기독교문화 형성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매체다. 이 같은 인식이 긴급히 요청된다.

안용준 목사 (캐나다 토론토대 종교개혁연구원·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