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13) 처 고모 도움으로 1995년 재활센터 흰돌회 설립

입력 2010-03-28 17:20


교도소에 장기 복역한 후 출소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출소한 이후 돌아갈 가정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많은 이가 결손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서는 범죄자 낙인이 찍힌다. 그러다 보니 전과자인 이들은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다시 저지를 확률이 높다.

흰돌회는 재소자와 출소자의 사회재활을 돕기 위해 이화여대 영문과 윤정은 교수가 1995년 창립한 민간단체다. 윤 교수는 내 아내의 고모가 되는데, 어느 날 퇴직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로 전셋집을 얻어 출소자들을 돕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갓 출소한 사람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고, 이들이 기술을 배우거나 일자리를 얻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윤 교수가 회장, 내가 부회장을 맡아 흰돌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윤 교수는 동료 교수와 제자들, 지인을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한편 출소한 사람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애썼다. 그 중 하나가 이화여대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일이었는데, 최근까지도 흰돌회에 소속된 출소자 다섯 명이 그 일을 담당해 왔다.

안타깝게도 윤 교수는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흰돌회는 은평천사원에서 맡아 운영하게 됐다. 윤 교수가 암으로 투병하던 당시, 천사원에서는 부지 일부를 매각한 돈으로 응암동에 출소자를 위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윤 교수는 몹시 기뻐하면서 개관식 날 흰돌회 현판을 직접 달았다.

흰돌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3∼4년 부지런히 일을 해 돈을 모아 독립해 나간다. 17년을 교도소에서 지내다 나온 한 출소자는 내가 주례를 서서 결혼도 했다. 부인도 함께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더니 흰돌회에서 처음으로 집을 사서 나갔다. 철물 줍는 일을 했던 그를 돕기 위해 천사원에서 공사하고 버리는 건축 폐자재를 넘겨주기도 했는데, 과연 보람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 후원금 100만원을 들고 찾아온 그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흰돌회를 거쳐 간 사람은 120여명에 이른다. 흰돌회는 국고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해 기부금만으로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흰돌회 직원에게는 월급을 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모자쉼터’를 운영할 경우 서울시에서 직원 월급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모자쉼터의 문도 열게 됐다. 다세대주택 7세대짜리 두 곳을 전세로 얻고, 인근에 단독주택 한 채도 장만해서 새롭게 시작했다. 그렇게 흰돌회는 출소자 쉼터와 모자가정 쉼터를 따로 운영하는 형태로 발전해 오고 있다.

모자쉼터는 사업 실패나 배우자의 사망, 가정 폭력 등으로 노숙 직전에 놓였거나, 이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모자 가족을 지원하는 단기보호 생활시설이다. 입소한 아이들에게는 방과 후 공부방과 청소년수련관을 이용토록 지원한다.

나는 흰돌회를 계속 키워 나갈 계획이다. 현재 출소자, 모자가족이라는 두 흰돌회의 사무실은 물론, 거주지 자체를 완전히 분리해 운영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두 번째 장기적인 계획은 흰돌회의 이름으로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출소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 한 채를 사서 쉼터를 만들고, 서울역 앞에 상담소를 개설해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다 살게 하는 것이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