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주은]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입력 2010-03-25 18:59


거의 놓치지 않고 재방송까지 열심히 챙겨보던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지난주에 예기치 못한 결말로 끝나는 바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영화를 감상할 때처럼 끝부분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확 뒤엎는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면서 TV를 봤어야 했다. 발랄한 시트콤에 그렇게 무거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다정다감하고 지성적인 젊은 의사선생을 향해 사랑의 불꽃을 태우던 시골 출신 가정부 처녀는 삶의 유일한 빛이던 그 사랑을 포기하고 머나먼 휴양지로 이민을 떠날 결심을 한다. 휴양지라 하면 남들에게는 환상의 낙원처럼 들리겠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아득한 미래일 뿐이다.

떠나던 그날에 공항까지 의사선생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여자는 오래도록 애태웠던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감에 젖어본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차창 밖, 그 험한 미래로 곧 내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는 이 편안하고 충만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그러면 좋겠어요.”

세상을 향해 주문을 거는 것 같은 여자의 대사가 나오고 그와 동시에, 맙소사, 정말로 소원이 이루어졌다. 장면은 그 상태로 멈추고 엔딩을 알리는 자막들이 정지된 화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던 나는 잠시 젓가락을 쥔 채 움직이지 않고 몇 초간 숨까지 멎은 상태로 지켜보았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바로 뒤이어질 두 사람의 사망 사고를 예기하는 장면이었기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아주 섬뜩해졌다.

‘그 후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맺는 전통적인 해피엔드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내어 버린 셈이었다. 평소에 익숙한 행복한 결말이란 미래에 대한 건강한 비전이었다. 헤어져 있던 연인은 다시 만나 앞날을 약속하고, 좌절한 사람은 더 나은 삶을 향해 꿋꿋이 일어서는가 하면, 비뚤어진 사람은 선하게 사는 것만이 희망이라고 깨닫게 되는….

그러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요즘 우리들에겐 마냥 미래로 향해가는 시간이 그리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취직하면 곧 결혼하자’ 하며 계획을 짜기엔 너무 막막한 젊은 구직자들에게, 그리고 얼마 후 계약이 끝나버리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새로 시작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불완전한 취업자들에게, 그 시트콤은 말해주려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변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미래형 해피엔드보다는 지금 가장 행복한 순간을 멈추어 영원하게 만드는 현재형 해피엔드를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이주은 성신여대 미술교육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