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안중근 순국 100년, 민족의 별로 빛나리

입력 2010-03-25 19:01

구국의 영웅이었다. 1909년 3월 5일 러시아 땅 엔치아에서 단지동맹을 결성할 때부터 민족의 독립을 본격적으로 꿈꿨다. 그날 12인의 애국동지들은 왼손 무명지 첫 마디를 잘라낸 뒤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썼다. 그해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쏜 뒤 ‘코레아 우레!’(한국 만세)를 외쳤다. 동포의 절절한 염원을 대변한 함성이었다.

평화의 사도였다. 법정에서 안 의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행위가 세계 평화를 위한 것임을 역설했다.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하나로 파악한 것이다. 이후 약지가 잘려진 수형(手形)은 민족 독립과 세계 평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다. 55점에 이르는 유묵에는 그의 고결한 정신세계가 오롯이 담겨있다.

생사를 넘어선 초인이었다. 그의 담대함은 엄격한 집안 교육에서 비롯됐다. 안 의사의 사형선고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조마리아)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영웅의 죽음은 거룩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부인(김아려)이 고향에서 보낸 흰색 저고리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안중근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2분여간 기도한 뒤 교수대에 올라 조용히 최후를 맞았다. 이에 앞서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그리고 100년. 우리는 의사를 떳떳이 뵐 수 없다. 시신은 소재조차 알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다 한 세기를 훌쩍 흘려 보냈다. 생존자의 희미한 기억에 기대어 많은 사람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해 일본과 중국의 협조를 구하도록 지시했다. 기록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일본은 원죄를 고해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중국도 선구적인 항일운동가의 유해를 찾는 일인 만큼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유해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안 의사의 유지를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 그 내용은 한 나라의 진정한 독립과 자존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공존과 화해를 통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패권주의로 치달으면서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도 두루 적용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안 의사와 같은 영웅을 가진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민족의 길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것으로 믿는다. 그가 지펴 올린 평화의 횃불 또한 온 누리를 비출 것이다. 더불어 안 의사와 함께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 등 동지들의 빛나는 이름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