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로 대주교 암살을 사과합니다”… 엘살바도르 대통령, 서거 30년 만에 정부 관여 사실 시인
입력 2010-03-25 21:25
엘살바도르의 고(故)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서거 30주기인 24일 마우리시오 푸네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용서를 구했다. 그는 대주교의 죽음에 당시 정부가 관련됐다고 시인했다.
영자 신문 라틴아메리카 헤럴드 트리뷴에 따르면 푸네스 대통령은 이날 수도 산살바도르의 공항에서 열린 로메로 대주교 벽화 개막식에서 “오래 전에 했어야 할 일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오늘 본인은 엘살바도르 국가의 이름으로 30년 전의 암살 사건을 사과합니다. 로메로 대주교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며 최대의 애도를 표합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모든 힘을 쏟겠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 병원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4명의 무장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죽음 이후 엘살바도르에는 격렬한 내전이 12년이나 이어져 7만5000명이 희생됐다. 푸네스 대통령은 좌파 출신으로는 종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동안 엘살바도르 정부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에 대해 침묵했다. 그를 암살한 세력이 누구인지 규명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깊은 갈등과 반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보수적인 가톨릭 사제였던 로메로는 당시 엘살바도르에 만연한 정치적 억압과 폭력을 목격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설교를 통해 정부에 정의를 요구하고 가난한 이들과 좌파 게릴라들을 옹호하는 사목 활동을 폈다. 대주교 시절 그는 ‘가난한 자의 챔피언’으로 불렸다.
푸네스 대통령은 “지난 암흑기 수천명의 시민에게 테러를 가한 죽음의 세력이 30년 전 이날 로메로 대주교를 희생시켰으며,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정부 관료들의 보호와 협조 아래 행동했다”고 고백했다.
수천명의 군중은 이날 산살바도르 거리를 행진하며 로메로가 남긴 마지막 설교의 한 대목을 외쳤다. “날 죽일 순 있어도 정의를 죽일 수는 없다.” 로메로 대주교의 설교는 30년 만에 진실이 됐다.
푸네스 대통령은 “이제 로메로 대주교의 이름이 엘살바도르에 평안을 가져다주고, 삶의 비극을 끝내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덧붙였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