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석의 아웃도어] 역사 산책

입력 2010-03-25 18:05


지난 주말은 황사 바람이 심했다. 집안에만 있다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서울 내곡동 헌인릉은 조선 3대 임금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가 잠들어 있는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인릉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능 하면 그저 어릴 적 사생대회나 소풍 장소로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혼자 찾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여기도 아직 본격적인 봄은 오지 않았다. 평소 산이나 들에 나오면 배낭 메고 등산용 스틱을 휘저으며 걷는데 오랜만에 주머니에 손 찌르고 여유롭게 걸었다. 독일 라인 강변을 걸으며 사색하는 괴테가 된 것처럼 한가롭다.

헌인릉은 능 둘레에 산책길이 잘 나 있었다. 입구를 지나 인릉 봉분을 구경하고 내려오면 헌릉으로 가는 길 왼편에서 시작해 1시간 정도 헌릉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호젓한 걷기 코스가 있다. 기왕 온 김에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더 걸었다. 언덕과 경치가 적당하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숲이 깊었다. 마지막 코스인 헌릉 봉분까지 구경하고 내려오니 어느덧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서늘한 날씨임에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걷는 도중에 이곳 오리나무 숲이 유명하고, 세종대왕릉인 영릉이 여기 있다가 경기도 여주로 이장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조선왕릉은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사적지이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의 임금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다들 당대 최고의 명당에 터를 잡았다. 주변 경관이 빼어난 건 말할 것도 없고 철따라 펼쳐지는 식생의 조화가 눈부시다. 이른 봄 영릉에는 신록의 향기와 햇살이 눈부시고, 여름에는 인조대왕의 아버지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김포 장릉(章陵)을 찾으면 연향이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 준다. 가을에는 광릉과 태릉의 낙엽 빛깔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한겨울 눈 내린 서오릉의 오솔길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왕조는 519년 동안 27명의 왕을 두었으며, 왕비와 빈, 왕자, 옹주의 묘를 합하면 44기의 능을 남겼다. 그중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은 북한에 있고, 광해군과 연산군의 묘는 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한에 40개의 능이 있는데, 그중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 근교나 경기도에 자리하고 있다. 서오릉, 동구릉, 서삼릉 등은 한곳에서 여러 능을 만날 수 있는 곳인데, 제대로 보려면 하루로도 벅차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왕릉 말고도 많은 유적지가 있다. 신라 백제 고려의 왕릉과 유적지, 조선왕조의 태실(胎室) 또한 찾아볼 만한 아웃도어 답사지다. 유적지 주변을 걸으면 역사와 자연, 바람 외에도 사색을 만나게 된다. 내가 걷는 이 길을 원효대사가 걸었을 것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또는 대학자 유성룡이 걸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을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두어 시간 헌인릉을 걷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아웃도어 플래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