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 뒤적 명단만 2000명 힐끔 힐끔 대어를 찾는다… 그라운드 출동,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입력 2010-03-25 18:13


지난 19일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목동야구장. 홈플레이트 뒤쪽 관중석에 두툼한 점퍼와 장갑으로 무장한 이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다.

“잘 잤냐?” “찌뿌드드한데….”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선글라스 속 눈동자는 번개같이 운동장을 훑는다. 공을 때리는 경쾌한 배트 소리에도 허투루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손 안의 스톱워치를 검지와 중지 끝마디로 살짝살짝 만질 뿐이다. 타자가 1루까지 달린 시간을 슬쩍 확인한 시선은 다시 경기장 곳곳을 살핀다.

스톱워치 기록이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큰 홈런이 터져도 ‘눈 크게 뜨며 놀란 표정 짓기’ ‘휙 고개 돌려 쳐다보기’ ‘입 벌리고 응시하기’는 하수나 하는 짓이다.

“날씨가 너무 추운데….” “커피나 마실까?”

‘허허실실’이 넘실대는 이곳은 미국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집합소다. 일부러 한국을 찾아왔거나,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은 해마다 고교야구 개막과 함께 동면에서 깨어난다.

타깃은 고교생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타깃은 고교생이다. 대학생은 데려다 키우기에 늦은 감이 있고, 프로선수는 이미 임자가 있다. 고교야구 시즌 첫 대회, 황금사자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1년에 한 명만 제대로 골라잡아도 성공한 축에 드는 이 바닥에서 희박한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도리가 없다. 많이 다니고, 많이 보고, 많이 고민하는 수밖에.

스카우트의 1년 스케줄이 빡빡한 건 그래서다. 1월부터 두 달간 날씨가 따뜻한 경남 남해에 모인 고교야구팀들의 스프링캠프를 찾는 일정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경기장에서 보기 힘든 후보 선수까지 살필 기회다.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트윈스 스카우트로 11년째 활동 중인 김태민(39)씨는 “스카우트는 중간급 선수로 먹고 살아요. 아주 잘하면 누구나 알아 영입 경쟁도 치열하니까 숨은 진주를 찾으려는 거죠. 그런 옥석을 가리려면 스프링캠프를 꼭 둘러봐야 해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호주에서 태어나 1993∼96년 LG에서 프로생활을 한 뒤 국내에 정착, 2000년부터 전업 스카우트로 나섰다.

황금사자기를 시작으로 전국대회가 줄줄이 이어진다. 대통령배(4월), 청룡기(5월), 무등기(6월), 대붕기(7월 초), 화랑대기(7월 중순), 봉황대기(7월 말∼8월 초), 미추홀기(8월 중순), 전국체전(10월)까지 훑고 나면 가을이다.

10월엔 미국에 간다. 각국에서 활동하던 소속팀 스카우트들이 모이는 회의가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 스카우트 김종원(35)씨는 “누구를 데려올지, 어느 포지션을 보강할지, 다음 시즌을 위한 모든 것을 논의한다”고 했다. 미 대학야구선수 출신인 그는 스포츠 관련 업계에 종사하다 올해부터 스카우트 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11월부터는 미국이나 호주 리그를 보며 선수 보는 안목을 키운다. “완전히 3D 업종이에요. 쉬는 날도 없어요.” 스케줄을 설명하던 김태민씨가 한숨을 쉰다.

1번부터 9번까지 몽땅

스카우트들이 자리 잡은 경기장 지정석엔 메모하기 좋게 책상이 있다. 수첩에는 숫자가 빽빽하다. 볼 하나 던질 때마다, 방망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계속 적는다. “유망주만 적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김태민씨가 빙그레 웃는다. “우리 예측은 93% 옳습니다. 틀릴 확률도 7% 된다는 뜻이죠.”

실제로 그는 몇 주 전 케케묵은 짐을 정리하다 국내 프로구단에서 활약 중인 A선수(그는 다른 프로팀 선수를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의 중학교 시절 기록을 발견했다. ‘좋은 선수’라고 적혀 있었다. ‘아차’ 싶었다.

A선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고교 졸업 후 프로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는 “(A선수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시합에 계속 나왔다면 주목했을 텐데 부상으로 1년 정도 쉬었다. 그러면서 기억에서 잊혀졌다”고 말했다.

명색이 스카우트인데 유망선수 이름을 잊다니…. “제가 기록하는 한국선수가 2000명이 넘어요. 아시아 총괄이라서 일본 대만도 어느 정도 꿰고 있어야 하는데, 어휴, 그것까지 더하면…(웃음).”

꼼꼼히 기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김종원씨는 “다른 팀에서 한국선수를 스카우트했는데 난 전혀 모르는 선수면 팀에 뭐라고 설명하겠나, 그럴 때를 대비해서라도 모든 선수를 팔로업(follow up)한다”고 말했다.

좋은 선수를 데려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팀간 경쟁도 있지만 더 치열한 건 팀내 경쟁이다. 김태민씨는 “내 선수 못 데려가게 막는 건 우리 팀 동료 스카우트”라고 했다. 미네소타 트윈스는 스카우트가 30명 있다. 20명이 미국에 있고 나머진 한국 일본 대만 유럽 남미에 흩어져 있다.

그는 지난해 한국선수 몇 명이 정말 맘에 들었다고 한다. ‘꼭 잡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보고서를 올렸다. 하지만 같은 팀 유럽 담당이 데려온 선수를 본 뒤 자신의 주장을 접었다. “열여섯 살인데 1m90에 85㎏ 거포더군요. ‘네가 추천하는 선수가 이 선수보다 낫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죠.”

운도 따라야 한다. 2001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 류제국 선수를 먼저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당시 팀이 미국 신인선수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다. 그 선수에게 550만 달러를 써야해 류제국을 잡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걸 보는 ‘눈’

1m90의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저 투수는 키가 엄청 큰데요, 관심이 가겠어요?” “노(No), 노. 발을 들었다가 바로 던지지 않고 한 번 멈췄다가 던지잖아요.” 김종원씨가 고개를 저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체격을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니라고 한다. “투수는 체격조건이 중요하죠. 하지만 그건 ‘eye candy(보기에만 좋은 사탕)’일 수 있어요. 야구센스가 좋아야 합니다.”(김태민)

스카우트의 진짜 실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들여다보는 ‘눈’이다. 지도자, 부모, 지인들을 두루 만나며 선수 정보를 얻는다. 고르고 골라 데려가는데 왜 성공하지 못할까. 재미교포인 김종원씨는 문화 차이를 꼽았다. “한국선수들은 평생 누가 시켜서 훈련하는데 미국은 알아서 해야 해요. 일례로, 미국선수들은 스프링캠프 전에 몸을 다 만들어 오지만 한국선수들은 캠프에 와서야 몸을 만들려고 하죠.”

김태민씨는 선수 정신력이 약해 실패하는 건 스카우트의 잘못이라고 했다. “제가 접촉한 선수 중 ‘자신 없어요’라고 말한 선수가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줘 고맙다’고 한 뒤 한국에 남게 했죠. 이런 걸 들여다보는 안목이 필요해요.”

낮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 오전 10시에 시작한 경기는 한창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그게 제일 고역이에요. 밥도 제대로 못 먹어요.”

사방이 탁 트인 야구장에선 잔잔한 바람도 점퍼를 파고들어 살갗에 닿았다. 2시간이 지나자 손이 얼어 메모하기도 어려웠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