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만들기나 스타 만들기나… 똑같더라”

입력 2010-03-25 18:21


의원 보좌관 출신 연예인 매니저 ‘귀띔’ MGB엔터테인먼트 대표 김정훈

주말섹션 And를 만들면서 “이런 사람이 있는데…”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제보다. 지난주는 신인가수였다.

“애니(Anne)란 여가수가 있는데, 무명 연예인의 일상을 따라다녀 보는 건 어때요?”

“가수? 전에 한 번 썼는데….”(지난해 11월 20일자 And에 신인가수 서인국 기사가 실렸다.)

시큰둥해하자 제보자는 몇 마디 더 중얼거렸다. “서인국이랑은 다른데… 소속사 대표가 국회의원 보좌관 하던 사람이래요. 의원 만들기나, 스타 만들기나 똑같다면서 연예기획사 차렸다던데.”

서울 논현동 MGB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김정훈(45) 대표를 만난 것은 이틀 뒤, 19일 오후였다.

김 대표는 85학번이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고 졸업 후 공장에도 좀 다니다가(노동운동을 해보려 했다) 정치판에 뛰어든 운동권 출신 ‘386세대’.

8년간 국민회의·민주당·열린우리당 의원 5명을 보좌했다. 1997년 김병태 의원 정책비서(7급)로 시작해 박찬주 의원 비서관(5급)으로 ‘스카우트’됐다. 함승희 박종우 최재천 의원 보좌관(4급)을 지냈다.

11차례 선거캠프에서 일했다. 조순 서울시장 후보 유세팀, 김대중 대통령 후보 미디어대책반, 노무현 대통령 후보 정책기획실, 16·17대 총선과 수차례 재·보선. 그는 “11번 다 내 후보가 이겼다”고 했다.

어느새 열린우리당 보좌관 중 맏형뻘이 됐다. 이제 나도 ‘출마’를 준비해볼까, 그러려면 경력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경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2004년 여의도에서 나왔다.

지인이 대주주인 음반업체 전무, 친구가 운영하는 신용카드 제조회사 부회장을 거쳐, 후배가 인수한 팬텀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은 건 2008년 1월. 강호동이 속해 있던 국내 3대 연예기획사 중 하나였다.

전임 대표 때 발생한 ‘PD 뇌물 사건’을 수습하며 ‘복마전’ 연예계를 톡톡히 경험하고 같은 해 11월 MGB엔터테인먼트를 차렸다. 주력사업은 연예인 매니지먼트. 윤상현(MBC ‘내조의 여왕’) 윤세아(SBS ‘아내가 돌아왔다’) 등 배우 7명, 가수 1명, MC 1명이 소속돼 있다.

‘보좌관’ 그만 하려고 돌고 돌아 온 자리가 ‘매니저’다. 정치인 보좌관과 연예인 매니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러나 언제나 카메라 앵글 밖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 비슷한 면이 있긴 하다. 그래도, 정치는 나랏일이고 연예는 오락인데….

정치판과 연예계, 공통점

국회의원을 5명이나 ‘모시게’ 된 이야기는 꽤 길었다.

“…2004년 4월 17대 총선이 끝나고 여의도에서 나오려 했는데 최재천 의원 측에서 보좌관을 맡아 달래요. 거절할 수 없는 지인의 부탁이었고, 최 의원이 젊은 초선인데 캐릭터가 나쁘지 않았어요. ‘키워볼 만하겠다’는 생각에 수락했죠.”

-키운다고요?

“아이고, 말이 잘못 나왔네요, 보좌관들끼리 하는 말인데…. 의원들은 보좌관을 ‘그림자’로 생각해요. 절대 앞에 나서지 않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도 안 되는. 하지만 보좌관은 스스로 ‘메이커’라 여기죠. 의원이 정치인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는.”

-정치인 만들기와 연예인 만들기, 비슷하던가요?

“정치인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뭘까요? 언론에 나오는 거예요. 언론노출 빈도가 곧 인지도니까. 연예인도 똑같아요. 신문 방송에 얼굴 알려야 뜰 수 있죠. 그걸 도와주는 게 보좌관이고, 매니저예요.”

그런가? 이후 같은 패턴의 문답이 이어졌다.

-정치인 되려면 공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연예인은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죠. 요즘 지방선거 공천시즌인데, 학력 경력 도덕성 자질… 여러 항목이 있지만 결국 잣대는 당선 가능성이에요. 지난 6일 신인배우 오디션을 했어요. 노래 시켜보고, 말재주 보고, 카메라 앞에 세워보면서 제가 보려 한 건 스타 가능성, 하나예요. 이 친구가 과연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정치인은 지지율에 민감한데.

“연예인은 인기에 목숨 걸죠. 정치나 연예나 모두 사람장사예요.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 싸우는, ‘내 편 만들기’죠.”

-뇌물 때문에 사라지는 정치인이 많은데.

“연예인은 스캔들 한방에 날아가요. 사람장사에서 도덕성 손상은 치명적이죠. 요즘 연예계 스캔들은 진화했어요. 열애설은 큰 흠이 안 돼요. 성범죄 같은 비도덕적 스캔들이 진짜 악재죠.”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데.

“연예인 인기는 짧으면 석 달이에요. 정치가 생물이라지만 연예계는 정말 어디로 튈지 몰라요.”

정치와 골프의 공통점은? ①가방 들어주는 사람과 같이 다닌다(보좌관-캐디). ②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끝장이다. ③돈이 오간다(뇌물-내기). 이 오래된 우스개가 떠올라 물었다.

정치판과 연예계의 공통점은? ①후진적이다(다른 분야에 비해 주먹구구식이다. 대중 눈높이에 못 미칠 때가 많다). ②의리가 없다(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정당과 소속사를 수시로 바꾸는 철새가 많다). ③컴백의 달인들이 산다(권력이나 인기는 마약 같아서 쉽게 잊지 못한다).

스타 만들기

정치인은 등급에 따라 수식어가 붙는다. 공천신청자, 후보자, 초선의원, 재선의원, 중진의원, 대권주자. 배우도 비슷한 단계를 밟는다. 연습생, 신인배우, 단역, 조연, 주연, 톱스타, 국민배우. 드라마 ‘내조의 여왕’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윤상현은 정치인으로 치면 어느 지점에 있는 걸까?

“재선의원쯤 되죠. 재선의원 정도면 자기 사람 만들고, 시·군·구청장 공천에도 관여하고 그러잖아요. 윤상현쯤 되면 ‘끼워팔기’가 가능해요. 드라마 출연 요청이 오면 우리 신인배우를 함께 출연시켜달라고 요구할 수 있죠. 실제 그런 적은 없지만. 윤세아는 아직 초선의원급이고요.”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MGB엔터테인먼트 신인 여배우 김신아(23). 김 대표의 ‘김신아 스타 만들기’ 로드맵은 이렇다.

지난해 2월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곧바로 연기수업을 시작했다. 연극을 전공하긴 했지만 영화나 드라마 연기는 다르다. 발성법부터 가르쳐주는 원로 연기자들이 있다. 보통 신인배우 2∼3명 교육에 월 200만원 정도 지급한다.

연기수업이 없는 날에는 노래 무용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짰다. 연기보다 다른 것을 더 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니저실장은 수시로 김신아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간 김신아’를 파악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5개월 뒤 김 대표에게 두툼한 ‘평가서’가 제출됐다. 그동안 지도한 트레이너들의 평가, 매니저실장이 찾아낸 성격 인간관계 가정환경, 본인이 선호하는 장르 등 그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겼다.

전체 스태프 회의가 소집됐다. 섹시함보다 청순·발랄한 이미지로, 뛰어난 가창력을 적극 활용해, 영화보다 드라마를 공략한다는 기본 전략과 함께 ‘김신아 프로젝트 3개년 계획’이 만들어졌다.

단역배우로 1년간 경험 쌓고, 2년차에 비중 있는 조연 2∼3편 한 뒤 3년 안에 지상파 드라마 주연을 따낸다는 게 골자다. 연기수업은 9개월 만에 끝내고, KBS ‘2009 전설의 고향’으로 TV에 데뷔하고, KBS ‘공부의 신’ 삽입곡 중 하나를 불렀다. 이제 프로젝트는 2년차로 접어들었다.

의원 만들기

-정치인도 이런 로드맵을 갖고 있나요.

“당연하죠. 국회의원 되는 순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보좌관들의 최대 고민도 ‘우리 의원이 어떤 자리를 거치게 하느냐’죠. 노무현 대통령 때는 로드맵 일정을 앞당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어요. 3선 의원이 대통령 되고, 17대 총선 세대교체로 중진급 재선의원이 등장했으니까.”

-정치에는 장르라고 할 게 없잖아요.

“국회엔 상임위원회가 있죠. 국회 개원 때면 의원실마다 상임위 배정 전략을 짜요. 최재천 의원의 경우 재경위나 외통위를 원했는데 법사위로 가게 됐어요. 그때 보좌관들이 무조건 여당 간사 맡으시라고 조언했죠. 그래야 목소리도 낼 수 있고, 인지도도 높아지니까. 법사위는 서열이 엄격해서 막내였던 최 의원이 망설였는데 결국 간사를 맡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어요.”

윤상현은 출연 요청이 들어오는 작품 중 고를 수 있지만, 김신아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찾아다녀야 한다. 요즘 TV 드라마는 대부분 외주 제작이다. 이 제작사들이 서울 논현동 청담동 일대에 몰려 있다. 김 대표가 논현동에 사무실을 차린 것도 제작사 ‘관리’를 위해서다. 평소 친분을 쌓아둬야 작품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고, 그래야 배우에 맞는 배역도 발견된다.

“의원 보좌진 중 1명은 지역구를 맡아요. 지역구 담당자는 일단 조기축구회부터 가입하죠. 애가 있으면 학부모회에 나갑니다. 향우회 관변단체 동호회마다 다니면서 꾸준히 관리하는 거예요. 11차례 선거하면서 ‘동책’을 몇 번 했어요. 선거구의 한 동을 맡아서 관리하는 건데, 정말 아침에 교회 가고 점심엔 절에 다녔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만들어지는 의원? 스타?

-보좌관 생활을 시작할 때와 지금 정치판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발전했죠. 더디긴 하지만 정치판은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바꿔 말하면 정치인 만들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거죠.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 기술 발휘할 여지가 줄어드니까. 여전히 정치인에게 가장 큰 유혹은 ‘돈’인데, 요즘 뇌물 사건들 보면 예전보다 액수부터 줄었잖아요.”

-연예계는요?

“정치에 비하면 변화 속도가 훨씬 느린 것 같아요. 연예인에게 최대 유혹은 ‘키워줄게’ 한마디인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말이 통해요. 일주일간 방송되는 지상파 3사 드라마가 모두 20편이에요. 편당 조연 이상이 10명 정도니까 배우 수요는 고작 200명인데 공급은 수천명이에요. 이런 공급과잉 시장에선 후진적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죠. 이 바닥 사람들은 종합편성채널로 수요가 늘면 연예계 시스템이 크게 바뀔 거라고들 해요.”

긴 얘기를 정리해보니 이렇다. 정치인 보좌관과 연예인 매니저 둘 다 해봤는데, 인기를 먹고사는 생리는 같더라, 다루는 주제가 무겁고 가벼울 뿐.

-정치판이나 연예계나 보좌관, 매니저를 잘 만나야 성공하겠네요?

“그럼 아무나 정치하고 스타 되게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나 재목이 아니면 절대 성공 못해요. 투철한 가치관과 넘치는 끼가 기본적으로 갖춰져야죠. 보좌관, 매니저는… 도와주는 거죠.”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