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호경] 억누를수록 튀어나온다
입력 2010-03-24 18:06
도서출판 한길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묵직한 출판 명가(名家)다. ‘한길사상신서’ ‘한길그레이트북스’와 같은 빛나는 대형 시리즈를 통해 전통과 권위를 축적하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 베스트셀러도 많이 냈지만 창립 초창기에는 시련도 숱하게 겪었다. 이른바 불온서적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 경고 및 영업정지를 누차 당해야 했다. 특히 1977년 리영희 당시 한양대 교수의 ‘우상과 이성’, 78년 박현채 조선대 교수의 ‘민족경제론’, 79년 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이 집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줄줄이 판매금지를 당해 존립 자체의 위기를 겪었다.
리영희 교수와 박관순 한길사 발행인(현 김언호 대표의 부인)이 수사기관에 연행됐을 때는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최초로 성명을 내 “언론에 대한 새로운 탄압의 일환”이라고 강력 비판했지만 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들이 권력 의도대로 하릴없이 사장(死藏)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지식인과 대학생 사이에 입소문이 돌면서 한길사 입장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 당대의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가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전 6권이 완간된 89년 연말에 중앙일간지·통신사·방송사 출판담당자들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얼마 전 출간한 회고록 ‘책의 공화국에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권력의 문제도서 압수와 수색은 오히려 이 책들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니 권력에 의한 가장 효과적인 ‘광고’였다. 80년대는 권력이 문제도서를 양산해내는 그런 시대였다. 아주 보편적인 내용도 젊은이들이 관심을 쏟고 읽으면 문제도서로 분류되는 책의 수난시대이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권력에 의해 그 책은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고 독서가 권장됐다.”
김 대표의 회고는 지나간 먼 시절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도 권력이 억압할수록 오히려 강한 반발과 저항을 초래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역설적 상황이 적지 않게 벌어진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례만 해도 ‘빵꾸똥꾸’ 사건과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을 들 수 있다.
19일 종영한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지난해 연말부터 온·오프라인 상의 핫이슈로 급부상한 데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빵꾸똥꾸’ 제재가 기실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방구대장 뿡뿡이’ 수준의 유아적 의성어에 대해 방통위가 “폭력적인 언행”이라며 사용 중단을 권고하면서 여론의 관심이 급격히 쏠린 것이다(기자도 이 시트콤을 전혀 안 보다가 ‘빵꾸똥꾸’ 논란 때문에 궁금해 보게 됐다). 한 술 더 떠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이 “정신분열증” “세상에 있는 욕설로 성에 차지 않아 과장된 말을 창조” 운운하며 기이할 정도로 극단적인 반감을 표출한 것은 불길에 더욱 부채질을 해댄 격이었다. 그 결과는 ‘빵꾸똥꾸’가 일약 최대 유행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국방부의 시대착오적 처사가 출판계에 어떤 ‘망외의 소득’을 안겨줬는지는 지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국방부 불온서적’을 검색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인터파크도서, 옥션, 예스24 등 온라인 서점에 죄다 ‘국방부 불온서적’ 별도 코너가 개설돼 있다. 물론 해당 도서를 한 묶음으로 찾아보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도서 판매량은 급증했고, 국방부는 결과적으로 불온서적을 ‘권장서적’으로 선전해준 꼴이 됐다.
무리하게 억누를수록 눌린 쪽이 튀어나오려는 경향은 어쩌면 인간 본연의 속성이고 자연의 이치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정치권에서, 시민사회 영역에서, 문화계에서 참을 수 없는 억압의 유혹을 느끼는 권력층의 여러 인사들은 한길사 대표의 술회를 곰곰이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김호경 특집기획부차장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