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는 월출, 여기 ‘日깨운’ 왕인의 모습이… ‘천의 얼굴’ 영암 월출산
입력 2010-03-24 19:40
봄빛이 완연한 월출산에서 우연하게도 한 사나이를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월출산 문필봉 기슭에 자리 잡은 왕인박사유적지의 영월관이었다. 선이 굵은 구릿빛 얼굴과 서리가 내린 듯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 중반의 사나이는 바다가 좋아 이름조차 채바다(蔡波多)로 바꾼 채길웅 시인. 그는 9년 전 떼배로 불리는 뗏목을 타고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고대뱃길 탐사에 성공해 화제를 모았던 해양탐험가였다.
영암 백리벚꽃길을 수놓은 벚꽃이 화사한 얼굴로 환송하던 2001년 4월 9일. 왕인박사 문화전파 뱃길탐사대장 채바다씨는 떼배를 타고 전남 영암의 대불항을 출항했다.
황포돛을 올리자 6m 길이의 통나무 10개를 엮어 만든 뗏목이 파도를 타고 미끄러졌다. 그는 대원 2명과 함께 열흘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항해 끝에 마침내 일본의 가라쓰항에 발을 디뎠다. 1600년 전 백제의 왕인박사가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가지고 도착했던 항구였다.
“내가 왜 거친 밤바다에서 일엽편주 떼배를 타고 ‘죽는 연습’을 했을까요? 왕인박사는 동양에서 공자 다음으로 훌륭한 학자입니다. 그는 일본의 르네상스를 이끈 아스카 문명의 시조이자 일본 학문의 중심에 선 CEO입니다. 왕인박사가 거쳐 갔던 고대항로를 탐험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넜지요.”
그날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 듯 그는 당시의 황포돛이 걸려있는 영월관에서 목청을 높였다. 왕인박사의 어떤 매력이 그를 바다로 끌어들였을까. 왜 그는 자신의 표현처럼 ‘거친 밤바다에서 죽는 연습’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사료는 전하지 않지만 월출산 문필봉 기슭에는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왕인박사의 흔적이 구전과 설화에 의해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왕인박사의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성기동의 집터는 월출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드넓은 잔디밭으로 꾸며졌다. 주지봉에서 흘러내리는 성천(聖川)을 거슬러 오르면 왕인박사가 마셨다는 우물에서 물이 솟아난다. 우물은 맥반석 덩어리인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옥수. 이 물을 마시면 왕인박사처럼 똑똑한 아들을 낳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져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왕인박사가 8세 때 수학했다는 문산재는 우물에서 20∼30분 거리. 작은 고개를 넘으면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 넓은 산책로가 나온다.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산책로는 동백꽃이 활짝 피어 어두컴컴한 숲을 밝힌다.
월출산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산으로 불린다.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산의 형태와 느낌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송곳처럼 날카로운 암봉이 위압감을 주지만 덕진차밭이나 모정저수지처럼 한발 뒤로 물러나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문산재로 가는 산책로도 그런 길이다. 숲과 계곡은 온통 낙화한 동백꽃들로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동백꽃이 떨어진 약수터는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황홀해 한 모금 마시면 심신조차 붉게 물든다. 학문이 산처럼 쌓인 곳이라는 뜻의 문산재는 훗날 복원한 곳. 문산재 옆에 위치한 양사재는 왕인박사가 같이 수학하던 동문들과 담론을 나눴다는 곳이다.
왕인박사가 책을 쌓아두고 공부했다는 책굴은 문산재 바로 위의 거대한 암봉 아래에 숨어있다. 책굴은 네댓평 정도의 평평한 바닥을 가진 자연동굴.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입구를 내려가면 천장의 바위 틈새로 푸른 하늘이 열리고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책굴 입구에는 왕인석상으로 불리는 2.7m 높이의 석상 하나가 서 있다. 왕인박사의 후학들이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해 고려 초기에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석상으로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모습이 영락없는 학자의 모습이다. 석상은 왕인박사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던 상대포를 바라보고 있다.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으로 왕인박사가 도공 등 45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는 상대포는 구림마을 남쪽에 위치한 옛 포구로 통일신라의 최치원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유학갔다고 전해진다. 상대포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배가 드나들었던 이름난 국제무역항.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의 서호강 간척사업과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진행된 영산강 하구둑 공사로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상대포는 작은 호수로 전락했다. 가수 하춘화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영암아리랑’의 서호강 몽햇들은 바다가 육지로 변한 서호면 일대를 말한다. 바다가 사라지면서 영암 갯벌에서 나던 쫄깃쫄깃한 맛의 영암 세발낙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
채바다 탐사대장의 떼배는 상대포의 둑에 보존되어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삼나무로 만든 떼배는 비바람에 썩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제2의 왕인박사호 떼배를 타고 다시 항해 길에 오르고 싶어 하는 그를 상대포에서 만났더라면 얼마나 민망스러웠을까.
한때 바다였던 작은 호수를 수놓았던 월출산 문필봉과 상대포의 정자 반영이 서호강 몽햇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작게 일렁이다 스러진다. 떼배의 운명을 암시하듯….
영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