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효지난 軍의문사 부실수사 은폐자료 없으면 손배청구 못해”

입력 2010-03-23 19:11

1988년 1월 강원도 명주군(현 강릉시)의 한 군부대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렸다. 보초를 서던 A씨가 소총을 쏴 목숨을 끊은 것이다. 헌병대는 A씨가 애인의 변심을 비관해 자살했다고 사건을 종결짓고 유족에게 통보했다.

헌병대 수사 결과를 믿지 못했던 유족들은 2006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자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위원회는 부대원과 당시 여자친구 등을 조사해 “A씨가 선임병의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결론 내렸다.

위원회 결정을 바탕으로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2억4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인 5년이 지나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군 당국의 부실 수사로 권리 행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청구권은 유효하다”며 73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었던 유족들은 대법원이 항소심을 깨뜨리자 또다시 비탄에 빠졌다.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대법원은 “당시 군 수사의 부실을 탓할 여지는 있어도 수사대가 구타·가혹 행위를 은폐할 의도로 사실을 왜곡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가가 원고의 청구권 행사를 방해했다는 점을 인정할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유족들은 파기환송심에서 당시 수사가 고의적으로 왜곡됐다는 입증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한 배상받기 어렵게 됐다.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 행위를 피해자와 유족이 입증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